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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스포츠가 없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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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1980년대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는 꿈의 구단이었다.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차범근이 뛰는 독일의 축구팀. 1980년 6월, 그 명문 구단 프랑크푸르트가 동대문 서울운동장에서 한국축구대표 화랑팀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경기 결과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이 녹색 그라운드를 슬슬 누비다가 가끔씩 묘기에 가까운 드리블, 슈팅 실력을 보여줬다는 정도만 생각이 난다.

2020년은 세계 스포츠의 암흑기 #우여곡절 끝에 프로야구 개막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 되새겨야

그렇지만 한가지 기억만큼은 뚜렷하다. 경기가 끝난 뒤 프랑크푸르트의 어떤 선수가 스탠드 끝자락에서 손을 흔들던 한 소년에게 다가가 그의 사인이 적힌 포토카드를 건넸던 순간이다. 빌리 노이베르거. 유명한 스타는 아니지만, 프랑크푸르트 미드필더를 이끌던 명수비수다. 그 이후 소년은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TV 스크린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스포츠 현장의 감동에 빠져들었다.

1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소년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노이베르거가 내민 사인 한 장의 효과다. 소년은 자라서 스포츠 담당 기자가 됐다. 지난해 축구 영웅 차범근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노이베르거는 과묵한 선수였지요. 그와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내 허벅지가 그렇게 굵었던가.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허허허.”

서소문포럼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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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는 축구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차범근과 노이베르거를 그라운드에서 만났던 그 순간이 한 사람의 인생 항로를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복싱 선수 홍수환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인천의 선인체육관. 홍수환은 멕시코의 알폰소 자모라를 상대로 세계타이틀전을 벌였다. 홍수환은 그날 자모라와 혈투를 벌이다 캔버스에 쓰러졌다. 멕시코 주심이 성급하게 홍수환의 KO패를 선언했다가 링사이드의 관중이 편파판정이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던 기억이 난다. 체육관을 찾았던 소년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홍수환의 패배는 아쉬웠지만, 그날 경기장의 분위기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선린상고의 박노준이 활약했던 시절 고교야구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고등학교 선수들의 야구를 지켜보기 위해 동대문 야구장이 꽉꽉 들어차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고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잠실구장으로 달려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 건물 3층 창문을 통해 책가방을 떨어뜨린 뒤 잠실로 줄행랑을 쳤던 시절이다. 책가방 속의 도시락 반찬통이 깨져 김칫국물이 줄줄 흘렀지만,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서울팀이 이기기만 한다면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음 날 선생님께 불려가 엎드린 채 ‘빳다’를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2020년은 스포츠의 암흑기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 모든 스포츠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당장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국내 4대 스포츠가 모두 중단되거나 취소됐다. 7월 말 개막 예정이던 도쿄 올림픽도 연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프로야구가 5일 시작됐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당분간은 무관중 경기로 열리지만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해 답답해하던 스포츠 팬들에겐 단비 같은 소식이다. 스포츠가 없었던 지난 몇 달간은 세상이 온통 암흑천지였다. 몇 년 지난 흘러간 경기가 아닌 말 그대로 생생한 라이브 경기를 보고 싶다고 호소하는 스포츠 팬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스포츠의 가치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라이브 경기가 중단됐던 기간,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기량을 겨루는 스포츠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스포츠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공정과 정의, 협력과 화합이야말로 스포츠의 가치다. 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승자의 배려, 패자의 승복을 배운다.

여러 사람의 피나는 노력 끝에 스포츠가 다시 시작됐다. 일선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올해처럼 스포츠 시즌 개막을 간절히 기다렸던 적은 없었다. 마지막 환자 한 사람까지 돌보는 게 의료진의 임무라면,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의 피·땀·눈물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스포츠 기자의 임무다. 우리는 그동안 코로나바이러스와 피나는 전쟁을 벌였다. 이제 코로나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평온한 일상으로의 복귀, 드디어 ‘플레이볼’이다.

정제원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