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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피플] “할수 있는 모든 것 한다” 코로나 위기 속 아베노믹스 집행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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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구로다 하루히코

구로다 하루히코

구로다 하루히코

“이 남자 때문에 일본 경제는 파멸할 것이다.”

세계적 투자가인 짐 로저스가 지난달 10일 일본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남자’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다. 로저스는 일본의 경제 정책에 대해 수년간 공개적으로 날 선 비판을 해왔다. 돈만 풀어댔을 뿐 재정 적자, 산업 경쟁력 등 근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격이었다.

경제 정책에 있어선 아베 신조 총리와 구로다 총재는 한 몸과 다름없다. ‘아베노믹스’의 집행관이자 후원자가 구로다 총재다. 아베 총리가 실패로 끝난 자신의 1기 집권(2006~2007) 이후 절치부심 뒤 2012년 총리 2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일본은행 총재로 점찍었다.

중앙은행 수장과 정치 지도자는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 지도자가 곧잘 인위적 경기 부양을 통해 대중에 영합하려는 속성이 있는 반면 물가·통화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중앙은행 수장이 브레이크를 걸곤 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게 툭하면 “미쳤다”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구로다 총재와 아베 총리는 찰떡궁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구로다 총재가 입버릇처럼 한 말은 “(아베노믹스를 위해)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한다”였다. 구로다는 2013년 취임한 뒤 연임을 거쳐 2023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

구로다와 아베의 오작교를 놓아준 인물은 아베노믹스의 설계자, 하마다 고이치(浜田宏一) 예일대 명예교수다. 하마다는 일본 언론에 “중앙은행이 돈을 제때 풀지 않아서 일본 경제가 거덜났다”거나 “정부가 재정적자를 떠안더라도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양적완화(QE)를 하지 않는 중앙은행 총재는 “지저귀지 않는 카나리아”라고 깎아내렸다. 그런 하마다가 구로다를 아베 총리에게 천거했다.

코로나19로 일생일대 위기 맞은 구로다

일본 인플레이션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일본 인플레이션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구로다에게 코로나19 사태는 최대 위기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달 27~28일 금융정책 결정회의를 주재했다. 단골 멘트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더 비장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가 인생의 목표로 설정한 아베노믹스의 성공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그는 국채 매입 상한 한도를 없앴고, 기업어음(CP)과 회사채 구입 상한액도 3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목표액을 두 배로 늘린 데 이은 추가 조치다. 양적완화의 차원을 바꾸는 ‘구로다식 돈풀기’다.

짐 로저스는 생각은 다르다. BOJ의 지속적인 유동성 확대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본이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돈을 풀어 코로나19 같은 경제위기에 대응할 카드를 소진해버렸다는 지적에 공감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BOJ는 전통 경제학에서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제로 금리 첫 도입도 QE 프로그램 시작도 일본이다.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는 세계 여러 중앙은행에 퍼졌다. BOJ라고 통화량을 조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기준금리 상향(0.25%)은 미국의 ‘닷컴 버블’로 도루묵이 됐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마이너스 금리(-0.1%)로 이어졌다.

코로나19, 아베노믹스 화살을 부러뜨리다

구로다 총재의 통화 정책은 양적 완화,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지향하는 아베노믹스를 충실히 따라왔다. 이를 두고 ‘3개의 화살’이란 말도 나왔다. 한때 장기 불황 탈출의 기대가 부풀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다. BOJ는 최근 2022년 물가상승률을 0.4~1.0%로 전망했다. 아베노믹스의 과녁(물가 상승률 2.0%)에서 크게 벗어난 수치다. 2분기 경제 성장률이 -30%까지 추락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4번째 화살’이라던 도쿄 올림픽은 올해 개최가 물 건너갔다. 아베도 구로다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라는 복병 때문이다.

엘리트 꽃길만 걸어온 책벌레

구로다 총재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 섰다. 그는 정통 엘리트 경제 관료로 꽃길만 걸어왔다. 후쿠오카현 출신으로 명문 도쿄대 법대를 졸업해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재무성에서 일하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에 올라 국제경제통 입지까지 굳혔다.

일본의 봄 연휴인 ‘골든 위크(4월말~5월초)’, 그는 뭘 했을까. 아마도 서재에서 책에 파묻혀 있을 공산이 크다. 그의 취미는 독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부터 베스트셀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도 즐겨 읽는다. 한 지인은 일본 언론에 “공무원이긴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관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금융정책결정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나 물러서진 않았다. 그는 “당분간 일본 경제는 어렵겠지만, 내년엔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고수했다. 골든 위크의 서가에서 그는 의지를 현실로 바꿀 답을 얻었을까. 새롭게 돌파구를 찾아낼지, 로저스의 말대로 일본 경제를 파멸로 이끌지,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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