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도 모셔간 'B612' 천재 개발자 "선배 말 절반만 들으라"

중앙일보

입력 2020.05.06 05:00

업데이트 2020.05.06 09:07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정보기술(IT) 산업에서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인공지능(AI) 등 관련 기술의 진화 속도는 물론, 소비자들의 기대치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AI 스타트업 '보이저엑스'를 이끄는 남세동 대표는 IT 분야에서 20년 넘게 꾸준히 성과를 내는 창업가로 유명하다. ‘슈퍼 개발자’, ‘천재 개발자’와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KAIST에 재학 중이던 1998년 네오위즈에 인턴으로 들어가 '원클릭 채팅'을 개발했다. 커뮤니티 서비스 세이클럽의 모태가 된 서비스다. 이후 네오위즈의 검색엔진 ‘첫눈’의 기획과 개발을 맡았다. 첫눈은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전에 구글과 네이버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았다. 2006년 네이버에 인수돼 네이버의 핵심 서비스로 진화했다. 이후 남 대표는 일본으로 넘어가 네이버의 자회사 라인에서 ‘라인 카메라’와 ‘B612’ 등을 만들었다.

그러고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17년 보이저엑스를 창업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서비스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지난 달 초에는 손글씨 200자만 쓰면 AI 기술로 글씨체를 아예 하나 만들어주는 서비스 ‘온글잎’을 선보였다.

보이저엑스가 지난달 출시한 온글잎 서비스. 손글씨로 200자만 적으면 내 글씨를 하나의 폰트로 만들어준다. [보이저엑스]

보이저엑스가 지난달 출시한 온글잎 서비스. 손글씨로 200자만 적으면 내 글씨를 하나의 폰트로 만들어준다. [보이저엑스]

남 대표가 개발한 채팅 서비스, 검색엔진, 카메라 앱 등은 이제 생활 필수품이 되다시피했다. 그가 내다보고 있을 가까운 미래가 궁금했다. 지난달 13일 서초동에 위치한 보이저엑스 사무실에서 남 대표를 만났다.

‘온글잎’은 AI의 핵심 기술인 딥러닝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다. 사용자가 손으로 한글 200자를 쓰면 AI가 글자별로 모양새가 달라진 부분과 특징을 학습해 사용자의 개성이 살아있는 글씨체를 만들어낸다. AI가 이렇게 글씨체 하나를 만드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글씨를 좀 더 정교하게 교정하는 작업을 한 번 더 거치면 총 30분이 걸린다. 글씨체 한 개를 만드는 데 소비자가 부담해야할 비용은 70만원. 아직은 매출이 크지않다고 한다.

남 대표는 “한글의 초성ㆍ중성ㆍ종성 조합을 해보면 한 가지 글씨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글자 수가 총 1만1172자나 된다”며 “기존에는 글씨체를 만드는 사람이 일일이 한 땀 한 땀 그려야 했기 때문에 글씨체 하나를 개발하는 데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영어는 알파벳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시중에 무료 글씨체가 수만 개다. 반면 한글은 무료 글씨체가 몇백 개뿐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보단 기업을 대상으로 개발한 서비스인데, 의외로 개인 소비자 문의가 많다고 한다. 남 대표는 "부모님이나 어린 자녀의 글씨체를 추억으로 보관하기 위해 글씨체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며 "연예인이 자신만의 글씨체를 만들고 싶다며 문의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온글잎의 기술로는 ‘○○에게’로 시작하는 팬레터 답장을 수 만장 모두 다 다르게 쓸 수 있어서다.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

보이저엑스는 온글잎 이전에도 생활밀착형 AI 서비스를 내놨다. 동영상 속 음성을 인식해 AI가 자동으로 자막을 달아주는 서비스 ‘브루’, 스마트폰으로 책을 찍으면 사진에서 휘어진 부분은 펴주고 그림자도 없애주는 문서 스캔 앱 ‘브이플랫’이다. 브루와 브이플랫 모두 일본, 미국, 인도 등에서 인기다. 해외 사용자 비중이 국내만큼이나 크다. 이들 서비스 모두 ‘어떻게 하면 AI 기술을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나온 결과물이다. 두 서비스 다 현재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지만 추후에 유료화도 검토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남 대표는 보이저엑스가 그간 시도했다가 실패한 프로젝트들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중간에 접은 것만 15개 정도 된다"고 했다. 인터뷰나 회의 음성녹음을텍스트로 대신 정리해주는 서비스도 만들어봤고, 미용실 가기 전에 머리를 어떻게 자르면 좋을지 보여주는 서비스도 만들어봤다. 남 대표는 "기술이 부족하거나, 혹은 실제로 상용화해도 많은 사람이 쓸지 확신이 안 들어 접기도 했다"며 "새로운 것에 많이 도전할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AI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미국ㆍ중국 등 AI 강대국을 따라갈 수 있을지 물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BTS나 ‘기생충’ 같은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충무로가 할리우드랑 맞먹을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며 “아직은 미국ㆍ중국 등과 비교하기는 무리다”라고 설명했다.

남 대표는 “학계에서도, 산업계에서도 한국이 글로벌 AI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많아 봤자 2~3%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 번에 IT 강국을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BTS’와 같은 사례가 많이 나올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15년째 55명 선에 머물러 있다. 컴퓨터 등 IT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는데, 관련 인재를 배출하는 속도나 양은 그대로다. 미국 스탠퍼드대는 공과대학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ㆍ부전공으로 공부한다.

“국내에서 ‘개발자’로 분류되는 사람 숫자는 최소 10만명, 최대 30만명이라고 한다. 숫자만 봤을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잘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남 대표는 "개발자로 일하다가 실제로 내가 창업을 해보니 창업은 거의 ‘극기훈련’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본기와 체력을 키운 다음에 극기훈련에 도전해야 하듯 창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실력도, 인맥도, 어느 정도 자본도 준비된 다음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회사에 갓 입사한 동료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주는지 물었다. 그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절반만 들으라고 당부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얘기 좀 듣는 학생들 대다수는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적고 선배들 말도 잘 따른다고 한다. 대학생들조차도 교수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선배들 얘기를 너무 잘 들으면 안 된다. 아이돌 그룹 가수가 꿈인 사람이 트로트만 부르던 선배 가수한테서 참고할 얘기와 그렇지 않은 얘기가 있지 않냐. ‘트위터 할 시간에 노래 연습이나 해라’는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BTS는 태어날 수 없었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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