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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집단면역은 안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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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또 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전 국민’이란다.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가 주거니 받거니 띄운 ‘전 국민 고용보험’ 얘기다. 고용보험은 일하던 사람이 실직하면 생계를 위해 급여를 주는 고용안전망이다.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비도 대준다.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에 근로자의 임금을 대신 부담하는 고용유지지원금도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일하는 2700만명을 위한 제도다. 유아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까지 적용되는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과는 다르다. 대상 자체가 ‘전 국민’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취약계층 사회안전망 편입 시급해 #‘전 국민’식의 포퓰리즘 접근 대신 #실업부조 법제화 등 할 일부터 해야

정부가 이런 고용보험의 성격을 모르지는 않을 거다. 한데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한다고 하니 포퓰리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거다. 정부 구상에 은퇴해서 쉬는 노인이나, 취업도 직업훈련도 관심 없는 니트(NEET)족에게까지 돈을 준다는 의미는 아닌 듯하다. ‘취업자보험’을 거론한 게 아닌가 싶다.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고용보험에 가입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피용자보험’이다. 다른 나라의 고용(실업)보험도 비슷하다. 사업장에 고용돼 일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다.

이러다 보니 보험설계사나 대리운전, 학습지 교사 같은 프리랜서형 근로자, 이른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고용보험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자영업자에게는 자발적(임의) 가입으로 문호를 열었지만, 소득 노출과 보험료 부담을 꺼려 가입률은 턱없이 낮다. 가입 대상은 2700만명인데, 가입한 사람은 1376만명에 불과하다. 사각지대가 무려 50%다. 일을 하고도 실업급여는 고사하고, 직업훈련비도 못 받는다. 한마디로 방치상태다. 일자리를 잃으면 이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속절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이런 맹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손보려 하고, 대다수가 그에 공감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전 국민’이라고 부풀려서는 곤란하다. 일하지 않는 고령자까지 수령 대상으로 삼는 양 튀기면 신뢰에 훼손이 간다. 정책은 타깃이 명확해야 하고,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 가뜩이나 고용보험기금(실업급여 부문)은 코로나19 여파로 올 상반기 중에 동이 날 판이다. 실업급여도 못 줄 지경이란 뜻이다.

서소문포럼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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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할 일부터 해야 한다. 고용보험의 안정화 작업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사각지대를 없애는 노력부터 하는 게 맞다.

이미 국회에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고용보험 가입 대상에 편입하는 법안이 제출돼 있다. 이것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180석이면 못할 게 뭔가. 굳이 선동 냄새 풀풀 풍기는 ‘전 국민’이라는 말로 현혹할 이유가 없다. 또 자영업자에게 가입 문호를 열었는데도 왜 고용보험을 외면하고, 대신 정부가 아닌 중소기업중앙회가 운영하는 ‘노란우산공제’로 발길을 돌리는지, 그 까닭도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선진국형 실업부조제(국민취업지원제도)도 국회에 제출돼 있다. 일하려 발버둥 치지만 생계가 막막한 사람에게 월 50만원씩 6개월간 주고 구직활동을 돕는 제도다. 말 그대로 어려울 때 북돋우는 부조다. 현 정부의 국정 과제이자 일하는 복지형 제도다. 올해 예산도 편성하지 않았는가. 법이 통과되지 않아 집행을 못 하고 있다. 이런 것부터 제도로 확립하는 게 정부가 할 일 하는 거다.

더욱이 실업부조제는 두 가지 바퀴가 제대로 갖춰져야 굴러간다. 4차 산업혁명에 맞게 직업훈련 체계를 확 뜯어고치고, 맞춤형 일자리 제공이 가능한 고용서비스의 고도화가 뒷받침돼야 효과를 본다. 제도 도입 전에 이런 정지작업부터 하는 게 우선인데, 손 놓고 있지 않은가.

콘도르를 잡을 땐 거대한 먹이를 던진다. 실컷 먹은 콘도르는 불어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날지 못한다. 그 무게가 욕심이다. 덩치 크다고 경계를 늦추고 오만해서는 이념적 욕심을 채우는 꼴이 되기에 십상이다. 총선에서 180석을 얻었다고 마구 지르고 으쓱할 때가 아니다. 하던 일, 해야 할 일부터 제대로 마무리하고 볼 일이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툭하면 ‘전 국민’을 들먹이며 타깃 없는 정책 구상을 쏟아내면 정작 ‘전 국민’은 불안해진다. 포퓰리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걱정이 앞서게 된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간신히 벗어나고 있다. 고쳐야 할 것도 많이 봤다. 개선할 건 과감하게 확 뜯어고쳐야 한다. 다만 포퓰리즘으로 이용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경제는 이상주의의 제물이 아닌 현실이다. 질러놓고 집단면역으로 항체가 생기길 기다려선 경제 전쟁의 제물로 전락할 수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