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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7200㎞ 공조, 백혈병 아이 아버지 "기적이 일어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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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은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한다. 인도에서 지내다 백혈병에 걸린 다섯 살배기 A양의 5일 입국은 정부가 의무를 다한 결과였다. 하지만 일본과 인도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이 이 의무를 다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한국 다섯살 여아, 인도서 병 악화 #일본 “전세기 세 좌석 내주겠다” #자국 경유 위한 비자도 신속 발급 #인도 의료진은 수혈하며 귀국 지원

A양은 지난 4일 오후 7시5분(현지시간) 인도 뉴델리 국제공항에서 어머니, 한 살 터울의 언니와 함께 일본 정부가 마련한 일본항공(JAL) 특별기편으로 출발해 5일 오전 6시25분 일본 하네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네다 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이동한 A양 가족은 5일 오후 7시30분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도~일본~한국까지 장장 7200㎞를 거친 귀국이었다.

백혈병 아이 구하기 3국 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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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협조 요청에 인도는 공항을 열어주고 일본은 비행기를 내줬다’는 간단한 한 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3국 외교 당국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A양은 급성 백혈병으로 지난 2일쯤 인도 뉴델리 인근 구루그람(옛 구르가온)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증세가 악화해 국내 치료가 시급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3월 말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가 봉쇄령을 시행 중이라 국제선 항공편은 운항을 전면 중단했다.

소식을 접한 한인회와 주인도 한국대사관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항공편 마련이 급했다. 한국 정부가 마련하는 특별기는 이달 중순 혹은 하순에나 예정돼 있었다. 이에 대사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도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단에 SOS를 쳤다. 3일 20여 개국 외교관들이 코로나19 상황 등을 공유하려고 만든 메신저 ‘왓차앱’ 단체 채팅방에 “긴급히 귀국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고 도움을 청했다.

화답한 건 주인도 일본대사관이었다. 4일 띄우는 전세기가 있으니 자리를 내주겠다고 했다. 신봉길 주인도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처음 일본 측은 두 자리까지 가능하다고 했는데, A양의 언니까지 함께 가야 해서 꼭 세 자리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더니 다시 검토한 끝에 세 자리를 모두 확보해 줬다”고 말했다.

한·일 7200㎞ 공조, 백혈병 아이 아버지 “절망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사실 코로나19 발생 이후 한·일은 교민 수송을 위해 수차례 협력해 왔다. 특히 지난달 28일 인도 뭄바이에서 한국 국적자들을 태워 오기 위한 임시 항공편이 떴는데, 당시 주인도 일본대사관의 부탁으로 주재관 가족 등 일본 국적자 42명도 함께 탔다.

한국인 128명을 태우고도 다행히 좌석 여유가 있었고, 일본 외에 대만과 인도 국적자들까지 외국인 96명이 해당 항공편에 함께 탑승했다. 일본 국적자들은 한국을 경유해 도쿄로 이동했다. 이번엔 A양이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왔으니, 양국이 품앗이라도 하듯 돌아가며 상대국 재외국민 보호를 지원한 셈이다.

일본은 사증(비자) 발급 절차도 신속하게 진행했다. 현재 일본대사관은 코로나19로 인해 사실상 전 직원이 재택근무 중인데, A양과 가족을 위해 일본대사관 비자 담당 영사가 출근해 곧바로 당일에 비자를 발급해 줬다고 한다.

일본은 현재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외를 둔 것은 물론이다. 모든 외국인들이 받아야 하는 일본 입국 시 검역 절차도 면제해 줬다.

인도에서 일본으로 이동하는 동안 A양의 의료 안전과 관련해선 인도 의료진이 나섰다. 출발 당일인 4일 수혈 등 조치를 하고 탑승해도 문제가 전혀 없다는 확인서를 끊어줘 JAL 측도 안심하고 A양을 태울 수 있었다.

병원에서 공항까지는 한국대사관 차량으로 이동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하늘길을 꽁꽁 막아 놓은 인도 정부도 A양 출국을 위한 수속 편의 제공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A양을 태운 JAL 항공기가 무사히 이륙한 것을 확인한 신 대사는 스즈키 사토시 주인도 일본대사에게 전화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스즈키 대사는 마침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어 한국에 대한 이해가 높은 외교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인도에 남아 있는 A양의 아버지는 신 대사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고 한다. ‘갑자기 비행편을 마련할 수 없을 것 같아 절망적이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의 경제 보복 등으로 한·일 관계가 날로 악화하는 가운데 제3국에서 다섯 살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양국 외교 당국이 힘을 모은 것을 외교가에선 ‘어린이날의 기적’으로 부르고 있다. 모순되게도 코로나19가 협력의 공간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A양의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인도와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어린이날 뜻깊은 일이 성사됐다”고 말했다.

유지혜 국제외교안보에디터·이유정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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