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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니스트의 눈

해외 주식 직구 붐…“한국 시장에선 먹을 게 안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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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무너지는 주식투자 국경…한국은 어떤 매력 팔 것인가

칼럼니스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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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오찬 자리에서의 일이다. 참석자 10명 중 8명이 퇴직한 모임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걱정하던 대화 흐름이 노후 불안으로 옮겨 갔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했으니 강남 부동산도 끝물이다. 재건축은 종치고 종합부동산세도 감당하기 어렵다” “정기 예금 금리가 1.5%이니 금융자산 굴리기도 힘들다”며 혀를 찼다. 한마디로 “더 이상 한국에선 먹을 게 없다”는 것이다. 앞날이 잘 안 보인다는 뜻이다.

저성장·저금리에 부동산도 시들 #코로나에 돋보이는 미국 빅 테크 #매력 상실하면 개미들도 등 돌려 #산업에 이어 투자도 공동화 되나

그러나 화제가 미국 주식으로 옮겨 가자 금세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요즘 나스닥 챙겨 보느라 새벽잠도 설친다” “코로나19로 언택트(비대면) 흐름이 확산되면 아마존·넷플릭스 주가는 더 오르지 않을까” “우리 젊은 개미들이 쓸어담은 해즈브로 주가가 대박 났데요. 손녀에게 줄 엘사 인형이나 만드는 줄 알았는데 온라인 교육 테마주더라고….” 얼마 전부터 퇴직자 8명 가운데 절반인 4명이 해외 주식 직구에 손을 댔다고 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국내 투자자가 많이 산 해외 주식

국내 투자자가 많이 산 해외 주식

올 들어 남녀노소 없이 해외주식 직구(직접 구매)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코로나19가 덮친 최근 한 달간 개인 투자자는 국내 주식을 약 7조 원어치 순매수했다. 이른바 ‘동학 개미’들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개인 투자자들은 해외 주식도 무려 2조3000억 원어치 순매수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더 이상 토종 주식에 집착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유망한 해외자산이 눈에 띄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실제로 재미도 짭짤했다. 3월 23일~4월 22일의 국내 주식과 해외 주식 순매수 상위 10개사를 비교해 보면 해외 주식의 평균 수익률이 33%로 국내 주식(19.4%)보다 13.6%포인트나 높았다.

물론 개인들이 해외 주식을 사는 데는 여전히 불편함이 따른다. 우선 해외 주식은 매매차익의 22%를 양도소득세로 내야 한다. 환전 수수료도 떠안아야 하고 환율 급변동에 따라 환차손이 발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차가 문제다. 한국의 심야 시간에 미국에서 급박하게 터져 나오는 대형 호재나 악재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쉽지 않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나스닥은 장중 ±5%씩 출렁이는 게 다반사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일이다. 한국 개미 투자자들이 최근 1조원 이상의 주식을 쓸어담은 전기차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가 사고를 쳤다. 트위터에 “내 생각에 테슬라 주가가 너무 높다”고 띄우자 불과 1시간 만에 주가가 10.8%나 곤두박질한 것이다. 같은 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더 큰 사고를 쳤다.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가 중국의 우한 바이러스 연구실에서 발원했다는 증거를 봤다”면서 “중국에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미·중 무역갈등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나스닥 지수는 284.60포인트(3.20%) 추락했다. 서울에선 공휴일 밤 12시에 일어난 일이니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주요 기술 기업 주가 추이

미국 주요 기술 기업 주가 추이

이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은 지난달 해외 주식 순매수의 92%를 미국 주식을 사는 데 쏟아부었다. 미국 주식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미국 경제에 대한 믿음이다. 미국은 가계가 금융자산의 46%를 주식에 투자하고 있고, 미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0%나 된다.(한국은 48%) 따라서 재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절대 주가 급락→소비 위축→경제 침체를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여기에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기술기업(빅 테크)들의 시장 지배력은 더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언 택트 문화가 확산되면 인터넷과 온라인 비즈니스에 강한 FANG(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 또는 MAGA(마이크로소프트·애플·구글·아마존)의 승자 독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주가가 더 올랐다. 지난해의 쓰라린 학습 효과도 컸다. 코스피 지수가 박스권에 갇혀 있을 동안 애플(86%)·마이크로소프트(56%) 등이 급등한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 주식이 답이다』는 책까지 나왔을 정도다.

돌아보면 지난 25년간 몇 차례 주식 펀드 형태로 해외에 투자했지만 모두 쓴맛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개인 투자자들이 직접 구매에 나선 것이다. 길게 보면 해외 주식 투자가 폭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현대차 주식을 34%나 갖고 있지만 한국 투자자들은 겨우 테슬라 주식을 1%가량 매입했을 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선진 18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해외주식 및 해외채권 보유액은 각각 45.8%, 56.3%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각각 9.5%, 3.5%에 그친다. 해외 금융 투자는 이제 시작인 셈이다.

2020년 월별 해외 주식 결제액

2020년 월별 해외 주식 결제액

세계 각국이 코로나19 사태로 기준 금리를 확 낮추고 재정을 마구 풀고 있다. 이런 긴급 처방으로 시장의 안정을 되찾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무엇으로 먹고살지 그림이 안 보인다. 돈만 풀어댈 따름이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유동성 장세에 따른 반등이 마무리되면 ‘포스트 코로나’의 옥석 가리기는 피할 수 없다. 국내에선 반도체나 바이오를 빼면 미래 비전이 잘 안 보이는 게 문제다. 그런 불안감이 개미 투자자들로 하여금 밤잠을 설치면서 해외 빅 테크 주식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지난달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 깜짝 등장한 인기 검색어는 ‘해즈브로’였다. 미국의 코로나 봉쇄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 자녀들을 위한 장난감 매출이 증가할 것이란 기대에다 해즈브로가 완구를 넘어 과감히 개척한 ‘온라인 교육’이 새로운 테마로 각광받은 것이다. 국내 개미들은 태평양 넘어 시가총액 9조원에 불과한 이 완구 회사 주식을 3000억원 가까이 가장 많이 사들였다. 그 덕분에 3월 16일 44달러였던 주가는 4월 17일 75달러로 70%나 뜀박질했다.

이제 세상은 평평해졌고 투자의 국경은 사라졌다. 같은 자동차 업종에서 테슬라와 쌍용차를 똑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가치를 비교하는 세상이다. 테슬라가 중국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보도가 나오는 반면 쌍용차는 신차 출시가 아니라 마지막 복직자들이 11년 만에 출근했다는 게 뉴스로 나왔다. 투자자들이 어디에 베팅할지 안 봐도 뻔하다. 이제 문재인 정부도 고용 유지를 위해 재정을 퍼붓더라도 어떻게 기업 경쟁력을 유지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매력 없는 기업에 투자할 눈먼 돈은 더 이상 없다. 경쟁력을 잃고 글로벌 시장에서 밀려나면 모든 정책 목표가 수포로 돌아가고 재정만 탕진할 뿐이다. 해외 주식 직구로 달려가는 개인 투자자들의 등 뒤에 미래의 불길한 징조가 어른거린다. 이대로 가면 산업 공동화에 이어 투자의 공동화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일본의 닮은꼴 되는가

해외 주식 직구 붐은 20년 시차를 두고 일본과 닮은꼴이 될 수 있다. 일본은 1960~80년대 고성장 시절에는 물가상승률이 높아 부동산 등 국내 실물자산 투자가 최고였다. 하지만 저성장·저금리 국면에선 디플레 압력으로 금융자산의 비중이 늘어났다. 특히 1991년 이후 거품이 붕괴하면서 부동산은 고점 대비 35% 수준까지 폭락했다. 이로 인해 60%에 달했던 부동산 투자 비중은 30%로 반 토막 났고 금융자산 비중이 61%로 늘어났다.

일본 개인투자자들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국내의 낮은 수익률에 질려 1997년부터 역외 펀드를 통해 해외 주식·채권 매수를 크게 늘였다. 특히 해외 채권이나 상장지수펀드(ETF) 등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에 집중 투자했다. 일본 주부들도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외화로 환전한 뒤 해외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패턴을 보였는데, 이런 ‘와타나베 부인’은 보통명사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2000년 이후 일본의 3040세대인 ‘단카이 주니어’들이 경제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부모인 ‘단카이 세대’와 전혀 다른 투자 패턴을 보인다. 저금리와 저출산·고령화가 워낙 뉴노멀이 돼 버린 탓에 노후를 미리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주택을 구입하는 대신 월세로 살면서 돈이 생기면 주로 주식형 공모펀드에 넣는다. 그 규모가 무려 1000조원이 넘는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은 선진국과 신흥국 주식을 나누어 사들이는 ‘밸런스형 펀드’를 선호한다. 국내 수익률이 워낙 낮아 아예 해외 자산에 골고루 투자하는 중위험·중수익 펀드가 인기를 끄는 것이다.

국내 경제연구소들은 우리도 일본을 뒤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지난 10년간 삼성전자·SK하이닉스·네이버를 제외하면 한국의 주력산업과 기업들은 성장도 멈추고 보상(배당)마저 적었다”며 “이대로 저성장·저금리 시대가 굳어지면 해외 주식 직구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보고서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국내 증권회사엔 직구족이 이미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수수료 수입이 수천억 원에 이르자 아예 해외 파트를 확대 개편하고 있다. 대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해외 주식팀을 따로 설치하거나 글로벌 기업 분석팀에 전문 인력을 배치해 고품질의 기업 보고서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