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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퍼스펙티브

따뜻한 보수 세우지 못하면 대선도 희망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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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조선시대 정치의 교훈과 한국의 보수

조선시대 따뜻한 보수정치 철학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원익·곽재우·최명길·송익필(왼쪽부터). 한국 보수세력이 바로 서려면 보수정치 철학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최종윤

조선시대 따뜻한 보수정치 철학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원익·곽재우·최명길·송익필(왼쪽부터). 한국 보수세력이 바로 서려면 보수정치 철학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최종윤

공자 사상은 인(仁)으로 수렴되고, 맹자는 이를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확장했다. 공자 사상이 지닌 인문적 성격을 맹자가 정치 분야로 확장했기에 인의예지는 맹자 정치사상의 기반이다. 유가의 이런 정치사상은 동아시아 정치를 오랫동안 주관해 왔다. 특히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공식화한 조선에선 유일한 치도(治道)의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인의예지 각각의 실마리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조선 정치를 담당했던 사대부의 행동강령에 해당한다.

조선 정치 이끌던 사대부는 인의예지 행동강령으로 삼아 #법보다 예절·규범 우선하는 따뜻한 보수정치 철학 지향 #한국 보수는 선거에 이기려는 꼼수만 있고 정치 철학 부재 #보수정치 철학 새롭게 정립 못 하면 유권자 외면 불가피

측은지심은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이다. 나라 형태로는 공화국(Republic)이다. 공화국은 말 그대로 ‘함께(共) 화합하는(和) 나라(國)’이다. 원래는 인(人)과 민(民), 즉 상부의 관리 계층과 하부의 생산 계층이 화합하는 나라로 의미가 제한되었는데 지금은 모든 구성원이 화합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이것이 보수정치 철학의 기반이다. 미국 공화당의 당명이 ‘Republican’인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 한국전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공동체에선 법보다 예절·규범이 우선한다. 이 점이 사회와 비교된다. 사회에선 모든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법에 따라 조정한다. 이것이 근대사회의 모습이자 근대국가의 정체성이다. 통치수단으로서 법은 객관적이고 투명하지만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다. 그래서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지만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차가움을 보완하는 게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따뜻함을 지향한다. 측은지심에 입각한 보수정치 철학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조선 시대 정치에서 가장 따뜻했던 성과 중 하나가 대동법이다.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가구(戶·호)당 징수에서 농지 규모(結·결)에 따른 징수로 바뀌었기 때문에 부호의 세금 부담은 늘고 백성의 부담은 줄었다.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토지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사대부가 양보했다. 이런 양보는 조선을 공동체로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대부가 이런 선택을 했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배가 난파하지 않았다.

대동법을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이원익(李元翼)이다. 그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지 않았다면 대동법 실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만큼 애민(愛民)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세 차례 영의정을 지내는 등 40년 세월을 정승으로 지냈지만, 은퇴 후에는 비좁은 초가에서 살면서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청백리 정치인이 오늘날 보수진영에 있을까 반문해 본다.

수오지심은 옳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염치가 있는 마음으로,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해당한다. 수오지심의 실천자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꼽고 싶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만으로도 수오지심을 지닌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의 수오지심이 빛나는 것은 전쟁 후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다 유배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 세력으로 인해 한반도 남북 모두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게 불가하다는 군사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국가 안위를 위해선 과거의 적이라도 화해할 수밖에 없다는 곽재우의 판단은 지금의 보수 세력에게 교훈을 준다. 현재 보수 세력은 한국전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반도를 이념 대결의 장으로 본다.

사양지심은 겸손한 마음이다. 이를 실천한 사대부로 병자호란 때 주화론에 앞장섰던 최명길(崔鳴吉)을 들고자 한다. 그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어서 반정 성공 후 상당한 상급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반정 공신처럼 적산(敵産)을 차지하거나 민전을 탈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하사한 충북 진천의 사패지(賜牌地)도 대부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백성으로부터 빼앗은 민전이 사패지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명길 묘소가 진천 부근인 청주 외곽 대율리에 정해진 이유로 본다. 백성에게 겸손함을 보였기에 진천 사람들이 그를 오래도록 기리려 한 것이다.

따뜻한 보수 인사 활동 공간 없어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다. 이와 관련해서 송익필(宋翼弼)이라는 인물을 들고 싶다. 그의 수제자가 서인의 사상적 지주였던 김장생이다. 그의 예학(禮學)은 송시열·송종길로 이어졌다. 소수였던 서인이 다수의 왕권중심주의 세력인 동인을 누르고 신권중심주의 이념을 조선에 펼 수 있었던 데는 송익필의 사상이 뒷받침됐다. 그는 조선 중기 사대부 중심의 지배이념을 만들어 낸 ‘사상계의 군주’다.

그는 서인의 핵심인 이율곡·성혼·정철 등과 교유했지만 실제로 이들을 리드했다고 본다. 그가 조선사에서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못한 것은 노비 출신이어서다. 그는 신분 때문에 출사를 포기했지만, 보수 이념을 정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오늘날로 치면 빈민 출신의 똑똑한 사람이 보수정치 철학의 성립을 주도한 셈이다.

조선왕조는 이원익·곽재우·최명길·송익필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600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다. 중국은 왕조가 길어야 250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 보수 세력은 조선 사대부와 비교할 때 정치 철학이 부실하거나 부재한 편이다. 선거에 이기려는 꼼수만 부린다. 그러니 이원익과 같은 인물의 활동 공간이 없다. 혹 있더라도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국민이 보수 세력에 참여하는 걸 꺼린다. 젊을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한국 보수의 전통적 힘은 품위와 절제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진보의 개혁과 경쟁할 수 있다. 이번 총선 결과는 보수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엄중한 경고이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보수정치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지 못하면 다음 대선에서 패배할 게 뻔하다.

과거 이념 잣대로는 유권자 끌어들일 수 없다

지금 보수의 이미지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게 사실이다. 이것이 보수의 딜레마이다. 서민에게 비친 강남 사람은 재산을 늘리기 위해 편법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아파트값의 가파른 상승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깨끗한 부는 대접받아야 마땅하지만 부동산값 상승으로 얻어진 불로소득은 존경받기 힘들다. 이런 이미지를 갖고 n포 세대와 집 없는 서민에게 어찌 표를 달라고 호소할 수 있을까?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도 보수 세력이 이들을 옹호한다면 적을 내부에 끌어안는 셈이다.

보수는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지금 보수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보수정치 일번지인 강남 갑구에 탈북 외교관이 공천되자 일부 보수 인사들은 그의 사상을 의심하며 후보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번 총선을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는 더는 소용없다는 게 드러났다. 많은 사람이 사안에 따라 진영을 넘나든다. 필자의 경우 어떤 사안에선 보수적이고, 어떤 사안에선 진보적이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졌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경제에선 보수적이다. 세금 누수가 심하다고 본다. 국가의 과도한 개입으로 예산이 지나치게 투입된다고 생각한다. 재정을 통하지 않고 민간에 맡기면 보다 나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교육에선 어떤 정당보다 진보적이다. 교육의 수월성보다는 개인의 창발성을 중요시한다. 대학 입시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필자처럼 기존 이념 잣대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유권자가 많다. 이들이 부동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부동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선거에서 이기는데 흘러간 이념으로 유권자에게 표를 호소하니 어찌 선거에 승리하겠는가. 선거 후 지금까지 보인 미래통합당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어 보여 답답하다.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