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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이천 참사와 ‘엑시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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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지난해 94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엑시트’는 남녀 주인공이 도심을 가득 덮은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룬 재난 탈출 영화다. 지상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차오르는 유독가스를 피하기 위해 이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으며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코믹영화에 가까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며 마냥 웃을 수 없던 이유는 달리고 또 달려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야만 살 수 있던 주인공의 상황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높은 곳’에 있어야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설정은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재난은 현실에서도 사회의 ‘낮은 곳’이나 ‘약한 고리’부터 습격한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 화재도 그 예다.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참사에서 희생자 대부분은 하청업체에 소속된 일용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였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다.

이천 화재 합동분향소에서 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천 화재 합동분향소에서 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재 다음 날 물류창고 현장 인근에서는 “네가 왜 거기서 죽어야만 했느냐” “내 아들 불쌍해서 어쩌냐”는 유가족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노부부는 물류창고로 향하는 언덕길을 네발로 기어 올라오다시피 했다. 우느라 탈진한 탓이었다. 쉰 목소리로 아들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이 노부부는 결국 물류창고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구급차를 타야만 했다. 합동분향소에서는 혼인신고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20대 남편, 가족끼리 일손을 돕다 함께 참변을 당한 부자(父子) 등 안타까운 사연이 계속 들려왔다. 어느 하나 애틋하지 않은 죽음은 없었다.

희생자들이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열악한 현장에 내몰렸다는 말도 속속 나온다. 공사현장 옆 동에서 일했다는 40대 이모씨는 “안전관리자도 없었고 안전교육도 없이 막무가내식으로 현장에 투입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소방당국 역시 “병행해서는 안 될 위험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며 안전 부주의를 지적했다.

공기(工期)를 단축해 공사비를 아끼려는 관행이나 ‘위험의 외주화’로 불리는 기형적인 하청구조 등이 산업 현장에서 안전이 뒷전인 이유로 꼽힌다. 사고가 나도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점도 거론된다. 40명이 숨진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당시 원청업체 대표가 받은 죗값은 벌금 2000만원이 전부였다.

영화 ‘엑시트’에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재난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법과 제도를 촘촘하게 재정비하고 엄격하게 시행해 노동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 생명을 잃는 악순환을 끊었으면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겠다”며 참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약속을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