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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퇴직연금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는 어디서 오는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일의 퇴직연금 이야기(55)

주류 경제학 이론에서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전형적 인간형을 일컬어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경제적 인간)’이라고 칭한다. 즉, 인간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라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H. 세일러 교수는 인간은 왜 ‘호모 이코노미쿠스’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는가에 주목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면 지극히 이성적이라서 정직하게 가격표를 공개한 백화점을 선택하지, 결코 세일 쿠폰을 남발하는 비이성적 백화점을 선택할 리 없고, 지극히 계산적이기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싸다는 이유만으로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인간이 이코노미쿠스, 이른바 ‘이콘(econ)’이 아닌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해서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지난해 말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2020 미래에셋 은퇴라이프 트렌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는데 50대 직장인이 느끼는 퇴직연금 수령액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큰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직장인에게 퇴직연금 기대 수령액과 기간을 물었더니, 현재 자신의 퇴직연금 보유금액에 비해 4.4배나 더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응답자의 퇴직연금 기대 수령액은 월평균 133만원, 기대 수령 기간은 20년이었다. 이만큼의 연금을 받기 위해서는 2억 6904만원이 필요하지만, 이들의 현재 보유액은 평균 6104만원에 불과했다. 향후 저축을 고려하더라도 차이가 너무 큰 편이다([그림1], [그림2] 참조).

그럼 이런 퇴직연금 수령액에 대한 현실과 기대의 차이, 즉 응답자들이 연금액을 과대 계산하는 경향은 왜 나타났을까?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령층(55~64세) 인구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연령’은 2006년 평균 50.3세에서 2017년 49.1세로 계속 낮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50대라면 대략 퇴직할 기간이 3~5년 정도라고 봤을 때 이들이 매우 공격적인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를 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경우에만 희망하는 퇴직연금 수령액을 받을 수 있다. 과연 그런 투자 행동을 보일까?

[그림3]에서 보면 50대의 투자 성향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안전 지향’이다. 개인의 기대수익률과 위험감수성향에 따라 투자성향을 ‘안전형-안정추구형-위험중립형-적극투자형-공격형’ 5단계로 나누었을 때, 50대 직장인 중 79.2%는 ‘안정추구형 및 안전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5명 중 4명은 은행 예금이나 국채, 금융채와 같이 투자원금을 잃을 확률이 매우 낮은 자산에만 투자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수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적극투자형 및 공격형’은 10.5% 수준이다.

결국 연금수령액을 과다 예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첫째, 응답자들이 현실적으로 자신이 가진 연금자산으로 받을 수 있는 연금액을 정확히 계산해 보지 않고 보유금액과 무관하게 막연히 자신이 받고 싶은 액수와 기간을 말했을 가능성이다. 응답자들의 기대 연금 수령 기간이 보유금액과 관계없이 ‘19~24년’ 수준으로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 이러한 가능성을 일부 뒷받침해 준다고 봤다.

둘째, 응답자들이 자신의 퇴직 시점과 저축 가능액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퇴직까지의 기간이 충분히 길게 남았다고 생각했거나, 자신이 앞으로 충분히 많은 금액을 저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의 연간 퇴직연금 적립액이 평균 541만원 수준인 것을 고려할 때, 지금의 소득을 10년 정도 더 유지한다고 가정하더라도 5000만~6000만원 정도를 추가로 저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연금 부족액(2억 800만원)의 1/4도 되지 않는 금액이다.

셋째, 응답자들이 퇴직급여나 연금의 산정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가졌을 가능성이다. 일반인이 자신의 퇴직연금 자산을 연금화했을 때, 정확히 매월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정밀하게 계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또한 DB형 퇴직연금 같은 경우에는 퇴직 시점에 퇴직급여가 정확하게 정해지므로 미리 금액을 추정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이런 오류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실제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는 점에서 응답자들이 연금 수령액에 대해 대체로 낙관적 기대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이런 경향을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낙관적 편향(optimism bias)’과 관련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본 글에서 보기에는 위의 이유도 일부 있을 수 있으나 50대 퇴직자들은 자신이 퇴직 시점에서 명퇴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 나온 추정이 더 많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퇴직자들이 자신의 퇴직급여액을 모를 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명퇴금을 수령한다면 기대 수령액과 비슷하게 자신의 미래 퇴직 예상 급여와 맞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낙관적 편향도 존재한다. 미래를 예측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른바 스스로에게 가하는 희망 고문 같은 것이다.

지금처럼 기업들의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과연 50대 직장인들이 코로나 이전 경제 상황처럼 명퇴금을 받을 가능성이 계속 있을지 심히 우려스럽다. [사진 pixabay]

지금처럼 기업들의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과연 50대 직장인들이 코로나 이전 경제 상황처럼 명퇴금을 받을 가능성이 계속 있을지 심히 우려스럽다. [사진 pixabay]

그렇다면 응답자들은 자신이 명퇴금을 받을 것을 과도하게 낙관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 본다. 그러면서 확증 편향적 경향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려 하고,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정보는 거부하는 편향이다. 사람의 수많은 비합리적인 사고 가운데 확증 편향만큼 잘 알려지고 잘 정리된 오류도 없을 것이다. 이런 확증편향 속에서는 심각한 오류를 안고 추론을 하거나 상상을 하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 결과가 이번 조사에서 너무도 과한 퇴직연금 수령액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코로나19사태는 이런 편향적 기대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지금처럼 기업들의 경영이 급속히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과연 50대 직장인들이 코로나 이전 경제 상황처럼 명퇴금을 받을 가능성이 계속 있을지 심히 우려스럽다. 오히려 그와는 달리 퇴직연령까지 직장을 지키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깨우쳐야 할 것은 퇴직연금 자산운용에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고 무턱대고 안정을 추구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는 거의 10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경향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꾸준히 중위험-중수익을 추구하는 자산운용 철학을 다듬고 키워나가기 위해 본 조사결과를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그랬으면 하는 바람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퇴직연금을 키워나가는 것은 이콘(econ)처럼 행동할 수 있다거나 막연한 기대감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지혜가 더욱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연금학회 퇴직연금 분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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