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외 딴사람과 말 안 하는 아이, 침묵을 무기로 삼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0.05.0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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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호 16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1〉 ‘선택적 함구증’

아이는 엄마 손을 꼭 쥔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불안장애 일종 ‘선택적 함구증’
1만 명당 3명꼴로 생기는 증상

유치원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뒤
‘입을 닫는 게 덜 위험하다’ 인식

불안해지면 침묵으로 회피 반복
치료 6개월 만에 짝꿍과 대화

“네가 은호구나. 안녕?” “…”

“은호야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해야지.”

엄마는 대답 없는 아이를 독촉했다. 은호는 진료실 바닥만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앉으세요 어머님. 여기가 은호 자리예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톤으로 은호와 엄마에게 자리를 권했다.

“은호야 대기실에서 기다리느라 아주 힘들었지?” 겨우 의자에 앉은 은호에게 가볍게 물었다.

“…” 은호는 책상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녜요 선생님. 은호가 좋아하는 동영상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걸요. 그렇지 은호야?”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아, 네 그랬군요. 은호야 정말 괜찮았어?” 은호는 고개 숙인 채 침묵했다. 엄마가 다시 불안해하며 뭔가 입을 떼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기다리라는 손짓과 함께 “어머님, 우리 은호가 대답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볼까요?”라고 권했다. 7~8초가량 정적이 흐르는 동안 엄마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방치 땐 대부분 사회공포증·우울증 걸려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미리 작성한 기초설문지를 보니 은호가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안 한다고요? 언제부터 그랬나요?”

엄마에게 진료 시작을 알리는 본격적인 첫 질문을 던졌다.

“원래도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는데 유치원을 옮기면서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친구들은 은호가 말을 전혀 못 하는 아이인 줄 알아요.”

엄마의 목소리가 다소 떨렸다. 엄마는 내원하기 전부터 맘카페에 아이 문제를 올리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고 아동발달센터를 찾아 상담도 받았다고 했다. 학교에 입학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으나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저 어릴 때 은호랑 똑같았다고 하시며 너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컸는데 은호도 그렇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소아정신과 간다고 하니 펄쩍 뛰시며 멀쩡한 아이 환자 만든다고 난리셨어요. 가족들과는 말을 잘하고 공부도 잘하니 집에서는 은호의 심각성을 이해 못 해요. 학교에서 언어장애가 있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엄마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은호가 울먹이는 엄마를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

“은호야, 우리 나무 한번 그려볼까?” 엄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수습하는 사이 나는 은호에게 살며시 종이와 연필을 내밀며 제안했다. 은호는 조심스럽게 연필을 집어 들더니 거침없이 나무줄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나뭇가지에 사과까지 주렁주렁 달았다. “우와! 은호 그림 엄청 잘 그리는구나. 집에 은호 그림들 많을 것 같은데 나중에 선생님 보여주면 좋겠네. 그럴 수 있어?”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 시작 20분 만에 처음 나온 반응이었다. 엄마의 얼굴이 밝아졌다.

은호처럼 가족들과는 말을 유창하게 잘하나 낯선 사람 앞이나 학교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는 선택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한다. 대체로 1만 명당 3명에서 1000명당 5명 정도 생긴다. 1877년 독일 의사 아돌프 쿠스멀은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사례를 보고하며 이를 ‘자발적 실어증(aphasia voluntaria)’이라고 명명했다.

그로부터 약 60년 후 ‘선택적 무언증’으로 바뀌고 1994년에는 소아정신장애 중 하나로 ‘선택적 함구증’이란 용어가 채택되어 현재까지 사용된다. 처음 이 병에 대한 인식은 아이가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해 또는 반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침묵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 병명에서 스스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도성’이 배제되고, 침묵이 ‘선택적’ 상황에서 나타남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최근 개정된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5)은 ‘선택적 함구증’을 불안장애의 하나로 분류했다.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어도 극도의 불안으로 인해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견해가 반영된 것이었다.

은호 엄마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은호가 여동생과 재잘거리며 노는 동영상을 재생해주었다. 동생과 활발하게 말하고 있는 아이가 진료실 안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은호는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한다. 엄마도 비슷한 기질을 보였으며 어린 시절 남들 앞에서 말할 때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회상했다. 나는 은호의 발병에 가족·유전 요인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럼에도 은호에게 증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는 이사하면서 옮긴 유치원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피아노에 맞춰 아이들이 순서대로 대답하는 활동에서 은호가 타이밍을 놓치며 다음 친구의 대답과 엉키게 되자 친구들 모두가 깔깔거리고 웃었던 일이었다. 그날 이후 은호는 유치원만 가면 아예 함구했고 선생님의 질문에는 몸짓으로만 대답했다고 한다.

두려움을 담당하는 인간의 뇌 회로는 측두엽 깊숙한 곳에 있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위협에 처할 때 본능적으로 편도체가 활성화하고 ‘맞서 싸우기 또는 도망가기’ 전략으로 대처하는데, 불안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자극에도 편도체가 과활성화하면서 자율신경계가 반응한다. 인간이 극도로 불안해지면 심장이 빨리 뛰거나 식은땀이 나는 등의 신체적 증상을 보이는 이유다. 불안감이 큰 사람은 대체로 싸우기보다 ‘도망가기’ 전략을 통해 안전지대로 회피하려는 성향을 자주 보인다. 은호 역시 유아기부터 대답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침묵’이라는 회피행동을 통해 불안을 제거하는 전략을 반복해 왔다.

인지행동·부모훈련·항불안제 병행 치료

선택적 함구의 부정적 강화 회로

선택적 함구의 부정적 강화 회로

은호가 질문에 대해 침묵할 때마다 주변 어른이나 친구는 함께 불안해진다. 그들은 은호를 구제해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때 은호는 침묵의 결과로 불안이 제거되는 이득을 얻으므로 그 이후에도 대답해야 하는 불안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침묵이라는 회피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것을 인지행동학적 관점에서 ‘선택적 침묵 강화 회로’라고 한다.

진료실 첫 20분 동안 침묵하는 은호와 대신 대답해주려는 엄마의 소통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18세기 프랑스 사제이자 문필가였던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신부는 그의 저서 『침묵의 기술』에서 침묵의 14가지 원칙 중 하나로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라고 묘사했다. 은호와 같이 선택적 함구증을 지닌 아이들은 함구하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하고 안전하기에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은호에게 1년 6개월여 동안 인지행동치료와 부모훈련 그리고 항불안제를 병행해 치료했다. 아이가 침묵할 경우 부모가 성급하게 ‘불안을 제거해주기(대신 말해주거나 침묵을 양해해주기)’를 하지 않고 아이의 침묵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가 조금이라도 ‘대답을 시도할 경우 적극 보상해주기’를 하는 행동수정 방식이었다.

아이는 치료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될 무렵부터 짝꿍과 말하기 시작했고 점차 담임선생님과도 대화하게 되었다. 가족과 대화할 때만큼 유창하지는 않아도 필요한 말은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까지 호전됐다. 만약 은호가 어린 시절 치료받지 않고 지속해서 침묵을 무기 삼아 두려움을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택적 함구증은 대부분 사회공포증을 수반하고 우울증으로 이행될 수 있어 방치될 경우 향후 대인관계 능력을 포함한 여러 기능이 손상될 수 있다.

올해로 은호를 만난 지 8년째다. 지금은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만나며 아이의 성장 과정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중이다. 평소 좋아하던 그림을 전공으로 살려 특성화고에 진학해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는 여중생 은호에게 ‘낯선 이와 말하기’는 더는 침묵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회피해야 할 만큼 위협의 대상이 아니다. 매번 올 때마다 그림 선물을 주고 가는 은호가 이번에는 나를 그려서 가져왔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 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 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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