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인물 분석 ‘부부의 심리’
비지상파 드라마 중 시청률 최고 기록(전국 22.9%, 닐슨코리아)을 세우며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JTBC ‘부부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힘은 불편함이다. “‘부부의 세계’가 아니라 ‘또라이 세계’”라는 박막례 할머니의 사이다 관전평처럼, 등장인물 모두 정상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라는 이태오(박해준)와 “내 인생은 완벽”한 줄 알았다가 뒤통수 맞고 분노로 폭주하는 지선우(김희애), ‘숭고한 사랑’임을 주장하는 불륜녀 여다경(한소희),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병원 동료들, 엄마를 배신한 아빠 편을 드는 아들…. 속 모를 인물 일색이다.
심리학자들이 본 등장 인물 #사랑에 작동하는 세 가지 뇌시스템 #성욕·로맨틱 러브·애착, 분리 가능 #태오의 삶, 불일치·모순으로 점철 #통합성·일관성 추구하는 아내 선우 #복수의 폭주 중 위험에 빠지기도
원작자가 그리스 비극 ‘메디아’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밝혔듯, 인간이 무의식 아래 감추고 사는 본성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현대판 그리스 비극’인 셈이다. 조지선 연세대 객원교수와 장근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두 심리학자에게 ‘부부의 세계’에 비친 인간 본성에 관해 물었다.
선우에 대한 ‘영혼의 안식처’ 고백은 진심
- 불륜을 넘어 매사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태오의 속내가 궁금하다. 선우와 다경을 ‘둘 다 사랑한다’고도 했는데.
- 장: 오히려 사실적인 캐릭터다.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 익숙한 이태오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인데, 이 부부가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선우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되는 직장에 꼭 맞게 사는 반면, 태오는 영화감독으로서 때론 모험도 해야 한다. 부인에게 자격지심이 있다기보단 그냥 다른 세상에 산다.
조: 태오의 삶의 테마는 불일치와 모순인데, 사실 누구나 그런 면이 있다. 규범을 지키면서 일탈을 꿈꾸고 잘못에 대해 나와 남에 대한 적용기준이 다른데, 그게 극대화된 캐릭터다. 선우에 대한 ‘불안한 내 영혼의 안식처’란 고백은 진심이다. 와이프는 심리적 안전망이면서 나의 무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내적 갈등이 있었을 거다.
장: 내가 보기엔 아무 생각이 없다.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으니 모순되게 행동하면서도 잘 지낸다. 그 내면은 알 필요가 없다. 표현하는 그대로, 그 순간만은 다 진심이니까. 대개 진심 내세우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사랑에 작동하는 세 가지 뇌시스템 성욕(lust)·로맨틱 러브(romantic love)·애착(attachment)이 분리될 수 있다고 하고, 심리학자 스턴버그는 ‘사랑의 삼각형 모형’에서 친밀감(intimacy)·열정(passion)·헌신(commitment)이 균형을 이뤄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 조: 셋 다 있으면 완전한 사랑인데 쉽지 않다는, 같은 얘기다. 단계마다 3요소의 역할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헌신이 모자라고 열정이 많다가 점점 열정보다 헌신이 커지는 식인데, 셋 중 둘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여기까진 다 이해한다. 로맨스와 열정이 끝까지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 관계에 다른 한 명이 끼어들면 분노한다. 학자들은 태오가 선우에겐 애착을, 다경에겐 로맨틱 러브를 느끼는 게 가능하다고 보지만, 사회적 규범이 내재화된 일반인들에겐 궤변이다.
장: 피셔는 진화적이고 생리학적인 인간을, 스턴버그는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한다. 피셔가 본 사랑은 불균형이다. 갈망하고 미치게 만드는 요소다. 반면 스턴버그에겐 ‘헌신’이 중요하다. ‘이 사람과 계속 갈 거야’라는, 책임감과 연결되는 의사결정이다. 그게 태오에겐 없다. 아니 있는데, 다른 여럿과도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조: 로맨틱 러브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3년이다. 태오와 다경의 사랑도 강렬함을 잃어가는 단계로 보인다. 애착과 헌신의 성숙함이 필요한 시점인데, 이제 와서 엉뚱하게 선우에게 집착을 보인다.
- 조강지처를 못 잊는 것 아닌가.
- 조: 다경이 20년 전의 선우처럼 나를 바라봐줬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가정을 꾸리고 다경에게서 더 이상 그걸 얻을 수 없다면, 선우를 다시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선우는 달라졌다.
장: ‘습관강도’라는 개념이 있다. 목이 마르면 그냥 음료수가 아니라 평소 마시던 뭔가를 마시고 싶어진다. 둘이 비슷해졌다면 습관강도는 선우 쪽이 높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갈망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 베스트셀러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의 저자 에스더 페렐은 행복한 커플도 외도를 한다고 했다.
- 조: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란 얘기다. 선우에게는 내가 멋진 사람이 아닌데, 여다경이 바라보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페렐도 불륜 저지른 사람들이 꼭 하는 말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라지 않나.
장: 연애 강의할 때 ‘연애는 결국 나를 예쁘게 비춰주는 거울을 찾는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모든 연애의 기본은 상대방에게 ‘너 정말 멋있어. 네가 세상의 중심이야’라고 온몸으로 얘기해주는 거다.
- 완벽주의자 선우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강박증 탓일까.
- 조: 완벽주의는 불안과 관련돼 있다. 행복보다 완벽을 추구했기에 아들과 놀아줄 시간도 없이 살았다. 남편과 서로 대체불가가 되기로 약속한 관계에서 배신을 당한 건 자기 코어가 깨뜨려진 거다. 트라우마가 생길 법하다.
장: 선우는 완벽이라기보다 통합성,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복수의 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폭주하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세상도 자기처럼 일관성 있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게 깨지니 혼란이 오고 헛발질할 수밖에 없는 거다.
- 남편에게 복수하려 자식을 학대하는 ‘메디아 콤플렉스’와 달리 선우는 아들에게 집착한다.
- 조: 선우에게 아들은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 아닐까.
장: 내가 그려놓은 세상을 유지해야 되는데 그 중요한 축이 아들이다. 아들을 죽였다고 착각하게 하는 메디아 모티브도 나오는데, 그걸 보면 아들을 아껴서가 아니라 내 세상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아들은 미칠 노릇이다. 엄마가 나를 이용하니까.
통상 불륜 드라마는 자녀를 평면적으로 그리지만 ‘부부의 세계’는 가정 해체 속 아들의 불안 심리에 적극 개입한다. 부모 사이에서 흔들리는 준영이 욕을 먹고 있지만, “애가 무슨 잘못이냐”는 게 두 학자의 말이다. 장 위원은 “엄마는 정의를 원하겠지만 애가 원하는 건 안정이다. 어디든 조금이라도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조 교수는 “보통 엄마 역할을 아빠가 해줬으니 애로서는 아빠가 중요하다. 배신을 목격했음에도 아빠를 택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하고, 정신과에도 엄마가 데려갔어야 하는데 방치한 책임이 있다”고 분석했다.
다경은 ‘내로남불’로 자기 합리화
- 남의 남편 뺏고 떳떳한 다경의 심리는.
- 조: ‘셀프 서빙 바이어스’라는 자기 편향이다. 자기 잘못에 대해 남들과 다르게 해석하는 ‘내로남불’인데, 어차피 끝날 결혼이었고 자기는 남자를 구원해준 입장인 거다. 불륜녀가 되고 싶지 않지만 되어있고, 헤어지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자기합리화다.
장: 이미 벌어진 사건을 바꿀 수 없으니 그걸 해석하는 인지적 요소를 바꾸는 건데, 남편의 외도를 원망하면서 아들의 외도를 옹호하는 시어머니도 비슷하다. 감정이입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한 건 내적 요소 덕이고 잘못한 건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외적 요소 탓을 한다. 감정이입 안 한 사람에 대해선 정반대다. 내 편은 다 옳아야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인지적 왜곡이다.
- 이중스파이 설명숙도 소름 끼친다.
- 조: ‘프레너미(friend+enemy)’란 말이 있다. 친구를 가장한 적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협이 된다. 절친이 같은 영역에서 나보다 훨씬 잘나간다면 어떨까. 명숙은 내내 씁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선우와 진정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장: 그에겐 이 부부의 싸움이 꽃놀이패일 거다. 내가 어디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양쪽을 통제할 수 있게 됐으니.
- 에스더 페렐은 “불륜은 새로운 상대가 아니라 새로운 자아를 찾은 것일 뿐이니, 불륜을 계기로 진실된 대화를 하고 제2의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선우 부부도 이혼이 정답이었을까.
- 조: 일단 이 불륜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지 관계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무조건 이혼이 정답은 아니다. 결혼 생활에 나쁜 것만 있지는 않으니까. 웨딩촬영 비디오 보고 있는 선우를 봐도 그렇다. 냉정하게 따져보고 정말 파괴적인 관계라면 이혼하는 게 맞다.
장: 선우가 일단 터놓는 시도는 했는데 태오가 부정하지 않았나. 마지막 기회를 차버리면서 전쟁이 시작된 거다. 만일 그때 잘못했다고 인정했다면 제2의 결혼도 가능했겠지만, 태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