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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딱 300마리…DNA 다른 100년 전 돼지고기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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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포항시 송학농장에서 키운 재래종 흑돼지고기를 이용해 장준우 셰프가 등심 부위로 만든 스테이크 요리. 스페인산 흑소금을 뿌렸다. 신인섭 기자

포항시 송학농장에서 키운 재래종 흑돼지고기를 이용해 장준우 셰프가 등심 부위로 만든 스테이크 요리. 스페인산 흑소금을 뿌렸다. 신인섭 기자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먹던 돼지고기는 어떤 맛이었을까. 궁금한 사람들 9명이 지난달 9일 저녁 요리사의 작업실에 모였다.

포항 송학농장의 재래돼지 #쫄깃 감칠맛 뼈등심 스테이크 #목살 스테이크는 아삭 씹는 맛 #느끼하지 않은 비계 맛도 일품 #검은 털에 코는 길고 귀는 쫑긋 #옛날 돼지 외형적 특징 그대로

지구 상에 단 한 종(種) 300여 마리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돼지의 뼈등심과 목살을 스테이크로 구웠다. 고기는 영상 0~5도 직냉식 저온 저장고에서 4주 숙성(Dry aging)했다. 근육 부위는 붉은색이 진해서 쇠고기에 가까웠다. 겉으로 두툼한 비계는 근육 사이로도 촘촘했다.

소금·후추만 뿌려서 잠시 뒀다가 기름을 살짝 둘러 달군 팬에 올렸다. 굽는 동안 비계에서 나온 기름을 고기 표면에 몇 차례 끼얹었다. 양쪽이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180도 오븐에서 4~5분 더 익히자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가 됐다.

굽기 전에는 비계가 많아 보였는데 다 익히니 그리 많지 않았다. 고기를 엄지손가락 굵기로 자르고, 돼지기름에 볶은 토마토·줄기콩·버섯과 미니 피클을 가니시로 곁들여 도마접시에 차리니 멋진 뼈등심 스테이크가 됐다. 근육 부위는 질긴 듯 쫄깃하면서 감칠맛과 고기 향이 진하다. 버터처럼 녹는 비계는 식어도 기름기가 엉기지 않고 씹으면 즙처럼 배어 나오는데 느끼하지는 않다.

잡내 없고 스튜 끓이면 소·돼지 중간 맛

목살 부위로 만든 흑돼지고기 스테이크. 신인섭 기자

목살 부위로 만든 흑돼지고기 스테이크. 신인섭 기자

목살 스테이크 비계는 질감이 뼈등심과 달랐다. 아삭거리는 듯, 설겅거리는 듯, 보통 먹는 외래 교잡종 돼지비계와는 전혀 달랐다. 물컹거리지 않아서 끝까지 씹는 맛이 있고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모인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감탄을 보탰다.

“엄청 맛있다. 확실히 다르다. 돼지고기라는 생각이 안 든다. 보기엔 비계가 많지만 한 점 먹으면 입 안에서는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비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동파육을 처음 먹었을 때 느낌이 떠올랐다. ‘맛있는 비계(지방)’가 이 돼지고기의 특징이자 경쟁력이겠다. 돼지고기 손질할 때 비계를 많이 깎아내는데, 이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비계를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일행 중 프랑스 요리 식당을 한다는 젊은 요리사는 “일반 돼지고기가 공장에서 나온 백지라면 이건 향과 무늬가 있는 수제 한지 같다”고 우아한 비유를 하기도 했다.

2년 전 이 돼지고기로 부산식 돼지국밥을 끓인 박찬일(55) 작가 겸 요리사는 “기름이 고소하고 비리지 않다… (삶은 고기를) 소금 찍어 한 점 먹어 본다. 지방이 깊게 먼저 온다. 다음으로 감칠맛이 깊게 퍼진다. 고기 말고 별다른 걸 넣지 않았는데도 잡냄새가 전혀 없다”고 썼다.

포항 연일읍에 있는 송학농장에서 키운 재래돼지 고기 얘기다. 한국종축개량협회가 지난해 4월 25일 공인한 민간에서 사육하는 유일한 재래돼지다.(순종 제주흑돼지, 복원한 재래돼지 축진참돈 등은 연구기관에서 키웠다.)

고기를 직접 구운 장준우(35) 작가 겸 요리사는 “잡내가 없다. 비계가 덜 느끼한 게 가장 큰 차이다. 이베리코 베요타처럼 비계에 탄성이 있어 텍스처가 좋다. 이걸 먹고 다른 고기를 먹으면 맛이 밋밋하고 싱겁다. 이 돼지는 지방층이 두꺼워 삼겹살로 동파육을 만들면 가장 잘 맞는다. 수육도 고소한 맛이 진하고 고기 향이 좋다. 이 고기로 스튜를 끓이면 사람들이 돼지인지 모른다. 소·돼지 중간 맛이 나온다”고 쌓인 경험을 얘기했다.

송학농장에서 키운 재래 돼지. [사진 송학농장]

송학농장에서 키운 재래 돼지. [사진 송학농장]

그는 아직 시중에 유통이 안 되는 이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다뤄본 요리사다. 한때 경제신문 기자였던 그는 요리에 빠져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뒤 시칠리아 레스토랑에 취업해 일을 더 배우고 귀국해 요리사 겸 작가로 활동하면서 송학농장을 운영하는 농학박사 이한보름(41)씨를 만났다. 둘은 재래돼지 고기를 가장 맛있게 세상에 알리는 일에 의기투합해 숙성과 조리법에 대해 2년 넘게 의견을 나누고 시식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송학농장 재래돼지의 연원은 1992년 시작됐다. 이 박사의 아버지 이석태(71)씨는 제주·남원·고성(경남)·지례 등지에서 흑돼지 300여 마리를 사 모았다. 대학 축산학과 출신의 이씨는 가톨릭농민회에서 토종 농산물 운동을 했고, 정월 대보름날 태어난 아들 이름을 ‘한보름’이라고 지을 만큼 토종 문화에 애정이 깊다.

숙성육 100g에 8000원, 이달 말 시판

이한보름 박사

이한보름 박사

전국에서 모인 돼지는 ‘털은 검고, 코가 길며, 턱이 곧고, 귀는 쫑긋하고, 안면과 처진 옆구리에 주름이 있고, 엉덩이는 빈약하다’는 문헌상 재래돼지의 외형적 특징에 따라 분류했다. 분류에 맞춰 5세대에 걸쳐 교배를 거듭하면서 재래돼지의 외형적 특징을 가진 개체만 골라 키웠다. 재래돼지 고유의 유전형질 8개도 발굴했고, 이 공로로 2003년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아들 이 박사는 동물생명과학과에 진학해 재래돼지를 유전학적으로 증명하는 연구를 계속했다. DNA를 분석해 재래돼지에만 나타나는 염기서열을 찾아냈다. 외형이 비슷한 돼지 중에서 염기서열이 같은 개체들을 다시 선별했다.

유전자분석 방법으로 재래돼지를 복원하고 확인한 사례는 송학농장이 처음이다. 이 박사는 2007년 ‘한국 재래돼지 특이 DNA 마커 및 이를 이용한 한국 재래돼지 판별방법’ 특허를 냈다.

이 돼지는 100년 전 조상들이 키운 것과 같은 재래돼지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당시 돼지의 유전자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록에 남은 옛날 돼지의 외형적 특징을 갖추고, 외래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이 돼지만의 특이 유전자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보다 더 정교하게 복원하고 확인한 재래돼지는 아직 없다.

‘재래돼지’ 원종은 확보했지만 남은 숙제는 판로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이어지고 종의 존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송학농장은 1999년 직접 식당(노적봉가든)을 내 재래돼지 고기를 팔았지만 10년 만에 접었다. 장사는 잘되는데 적자가 쌓였다. 수익이 생산원가에 못 미쳤다. 일반 돼지는 6개월이면 115㎏ 규격돈으로 자라는데 재래돼지는 1년 6개월쯤 걸린다. 가격경쟁이 안 된다.

맛을 아는 사람들이 비싸도 사서 먹는 게 유일한 출구다. 그 길을 고민했다. 숙성으로 풍미를 극대화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실험을 거듭했다. 최근에 맛의 정점이 보인다는 판단이 섰다. 재래돼지 인증 1년을 맞으며 고기를 다시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이달 말부터 숙성육을 판매할 예정이다. 값이 문제다. 평균 소비자가격 100g에 8000원으로 책정했다.

지구 상에 단 한 종뿐인 ‘재래돼지’의 운명을 시장과 소비자에게 묻는 것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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