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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보편 복지' 탈을 쓴 재난지원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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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호 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기로 하면서 보편 복지의 길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번 긴급재난지원금 지원은 보편 복지 탈을 쓴 선별 복지입니다. 처음부터 당정이 합의한 소득 하위 70% 이하에만 지원금을 주면 될 것을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한 뒤 상위 30% 계층에는 기부하라고 분위기를 띄웁니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 최적의 효과를 내려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속도로,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을 넘어야' 합니다. 이미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는 글렀습니다. 서둘러도 첫 지급 예정일은 4일입니다. 처음 지원금을 논의한 게 3월 27일이었으니 38일 걸리는 셈입니다. 이 기간에 많은 자영업자가 가게 문을 닫았거나 닫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지원금을 주겠다는 건 선별하는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행동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인데 거꾸로 간 셈입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377회 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 구제를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이 가결됐다. 뉴시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377회 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 구제를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이 가결됐다. 뉴시스

규모도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입니다. 지원금 지급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저소득층 생계지원입니까, 소비 진작입니까. 두 가지 목적이 다 있겠지만, 실제 노리는 건 소비 확대입니다. 지원금을 빨리 주고 쓰게 해 무너지는 자영업자 등을 일으키고 일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죠. 저소득층은 한계소비성향이 높습니다. 이들에게 더 많은 액수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게 소비 진작에 더 효과적입니다.

정부는 이번 지원금으로 경제 성장률을 0.1%포인트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밝혔지만, 서민이 체감하기 어렵고 뜬구름 잡는 얘기입니다. 지원금의 경제적 효과는 앞으로 국민의 씀씀이를 분석하면 나올 겁니다. 결과를 놓고 진영 대립이 격렬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보겠습니다.

이번 대책에 숨겨진 가장 큰 메시지는 우리 사회가 새로운 복지 환경에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현 정부는 '보편 복지'의 물꼬를 텄습니다. 보편 복지가 잘못된 정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냐의 큰 틀을 정부가 국민의 뜻을 묻지 않고 위기 상황을 활용해 슬그머니 정해서 밀어붙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료 행정안전부]

[자료 행정안전부]

복지 체제를 정하려면 나라별 경제 규모, 재정 상황, 복지 전달 구조, 계층 격차도 등 논의해야 할 변수가 많습니다. 코로나19로 불거진 경제 위기 상황에 공포를 느낀 국민은  총선을 맞아 여야가 경쟁적으로 외친 재난지원금 지급에 솔깃했습니다. 유권자의 심판 칼날이 무뎌진 이유입니다. 평소 나랏돈을 헤프게 쓰는 걸 비판하던 제1 야당의 대표는 전 국민에게 지원금을 주겠다는 자충수를 두었습니다. 여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활용해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안을 제시했습니다.

앞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랏돈을 풀 건가요. 경제가 휘청거릴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나라 곳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걱정되니까 이번에도 재난 지원금을 다 준다고 해 놓고선 고소득층에게는 기부하라고 강요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의 재정 상태나 경제 규모가 보편복지를 지탱할 수준이 된다고 보는 국민이 많을까요. 예산은 길이가 짧은 이불입니다. 이불로 머리를 덮으면 다리를 가리지 못하고, 다리 를 덮으면 머리와 가슴이 드러납니다. 재원이 충분하면 좋으련만 살림살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럴 땐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게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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