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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너~무 좋아! 바닷길 걸으며 목놓아 외친 이곳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1)

포르투갈 순례 걷기 스무 번째 날은 라브루헤(Labruge)에서 출발한다. 해안 길은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풍광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대상을 만났을 때 왜 울컥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역시 그 길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울컥, 코끝이 찡하다. 바다를 마주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탄식으로 숨을 뱉어내며 걸었는데 걸음마다 차오른 환희가 급기야 온몸을 들어 올렸다. 아무도 없는 길, 대서양을 따라 펼쳐진 이 멋진 세상을 통째로 선물 받았다는 자각이었다. 어제 마을에서 만났던 포르투갈 여인처럼, BTS 콘서트장에서 절정을 맞이한 아미가 되어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높고 큰 데시벨로 소리쳤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고.맙.습.니.다. 정말 너어어무 조오아아아요.” 비명에 가까운 환호였다. 혼자 걷는 길이니 마음껏 멈춰서 파도를 몰고오는 바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걸었다. 결국 두 시간 만에 목이 쉬었다.

수정처럼 맑은 공기와 하늘의 아름다운 바닷길.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서리처럼 차갑다. [사진 박재희]

수정처럼 맑은 공기와 하늘의 아름다운 바닷길.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서리처럼 차갑다. [사진 박재희]

누가 봤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소리소리 지르고 빙빙 돌면서 감동의 동영상과 사진을 계속 찍었더니 몇 시간 만에 휴대폰 밧데리가 모두 떨어졌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이 그렇게 좋았는데 앞으로 계속 이런 바닷길만 걷는다는 것이 살짝 아쉽기도 했던 마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목소리를 잃을 만큼 소리 지르던 호들갑이 진정될 무렵 빌라두콩드(Vila do Conde)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를 찾으려던 계획이었다. 10월인데다 공식적으로 시에스타는 폐지되었지만 오후 2시가 넘으니 대부분 식당에서 점심식사 주문을 마감한 상태다. 간단한 음료만 제공한다는 몇몇 카페에서 허탕을 치며 들락거리다가 함부르그에서 온 카스텔을 만났다. 빌라두콩드 마을에 들어서며 계속 마주친 순례자였다. 카스텔은 독일 재무성의 공무원이라고 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나라별로 순례자들이 보여주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일 사람에 관계된 것 중 하나는 그들이 거의 100% 가이드북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심지어 휴대폰 앱을 다운받아 보면서도 종이 책 가이드북을 함께 지닌 사람도 많다. 독일어 가이드북에 그 어떤 나라의 안내서보다 자세한 정보가 있다는 것도 대부분이 알고 동의하는 사실이다. 카스텔도 그런 안내서를 가지고 있었다.

대서양을 따라 긴 해변의 텐트에 머리만 식히며 일광욕을 하는 연인들.

대서양을 따라 긴 해변의 텐트에 머리만 식히며 일광욕을 하는 연인들.

바닷가 마을의 작고 소박한 교회가 어떤 이름있는 유적보다도아름답게 느껴진다 .

바닷가 마을의 작고 소박한 교회가 어떤 이름있는 유적보다도아름답게 느껴진다 .

“길이 정말 아름답지 않아? 해안길로 오길 참 잘한 것 같아.”
“그래 맞아. 그런데… 아름답지만 바닷길은 계속 비슷하지않을까?”
어쩜 그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그도 나처럼 기절할 만큼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했지만 정통 내륙 루트를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아름다움의 절정 해안길 루트를 벗어나는 것에 의기투합했다. 빌라두콩드에서 묵을 생각이었으므로 늦장을 부려 이미 3시가 넘고 있었다. 해지기 전까지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니까 서로 의지하고 가보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든 되겠지’ 천하태평인 반면 카스텔은 독일의 재무공무원답다. 매시간 주파해야 할 거리까지 계산했다. 나도 그도 너무나 다른 상대방이 신기했고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함께 라테스(Rates)를 향해 출발했다.

카스텔은 의외로 힘들어 했다. 190cm가 넘는 큰 키에 젊은 서양 남자라 해도 포르투에서 순례를 시작했으니 겨우 이틀째가 아닌가. 배낭을 메는 것도 하루 4만보가 넘는 걷기에도 아직 적응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지런히 걷는 동안 해가 땅으로 내려가 저녁 햇살이 퍼졌다. 시골길에서 카스텔이 통증으로 주저앉았을 때 마침 더없이 평화로운 성당 종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마을에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라테스의 순례자숙소 마당에 마을 축제를 위해 천막을 설치하고바비큐 준비를 한다.

라테스의 순례자숙소 마당에 마을 축제를 위해 천막을 설치하고바비큐 준비를 한다.

라테스에는 9세기에 처음 지어진 로마네스크 성당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처음 순례자 알베르게가 생긴 곳이기도 하다. 숙소 마당에는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비료냄새에 바비큐 냄새가 섞여 둥둥 떠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분주하게 장작을 피우고 추수한 옥수수를 담아둔 바구니를 뒷마당으로 날라왔다. 구석에서 커다란 돼지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장작불로 맛있는 윤기를 더하는 동안 우리는 뜨거운 호스피탈레로의 환영과 함께 등록도장을 받았다.

“오늘은 특별한 동네 축제가 있는 날이에요. 추수감사절 같은 거죠.”
순례자들은 모두 동네 축제에 초대받았다. 꼭 오라는 당부에 마음이 부풀었다.

“우리 길을 바꾸길 너무 잘했다. 그치? 안 왔으면 너무 아쉬울 뻔했어.”
아름다운 바닷길을 뒤로하고 루트를 바꿔 도착한 마을에서 포르투갈 순례 중 가장 인상적인 민속축제를 맞이한 것이다. 풍년 수확을 축하하는 저녁이다. 음식을 나눠먹고 마을 축제를 하는 날,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앉아 노래에 맞춰서 옥수수 껍질을 벗겨냈다.

풍년수확은 축하하는 축제. 마을 여인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옥수수를 말려 껍질을 깐다.

풍년수확은 축하하는 축제. 마을 여인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옥수수를 말려 껍질을 깐다.

포르투갈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인들.

포르투갈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인들.

여행하면서 아무리 시골이라도 동양인이 단 한명도 없는 마을은 라테스가 처음이다. 그날 저녁 나는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구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특별 대접을 받았다. 포르투갈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 앉아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구령에 맞춰 발을 굴렀다.

민속축제에서 노래를 불러준 여인. 한국인을 처음 본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민속축제에서 노래를 불러준 여인. 한국인을 처음 본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옆에 있는 할머니는 한국이 어딘지 모르는 눈치였다. 할머니 손자로 보이는 청년이 오래된 2002년 월드컵을 떠올렸다. 리듬에 맞춰 ‘대한민국~ 짜짜라작작’ 을 외치는데 또 한 번 뭉클 코끝이 맵다. 시도 때도 없는 감동은 와인 때문이었을까? 여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자란 가장 자유로운 존재지만 익숙한 모든 것과 떨어진 외로운 사람이 아니던가. 내 나라니 애국이니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이라도 ‘대애한민국 짜짜라작짝’ 리듬을 맞추는 사람을 만나면 더 친절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한국사람을 처음 보는 포르투갈의 시골 마을 사람들과 대한민국 리듬에 맞춰 옥수수껍질을 벗기고 보름달 아래 빙빙 돌며 민속춤을 추었다. 내일은 바르셀로스(Barcelos)까지 16km만 걷는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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