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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비판은 하되 상대방 시각도 고려하는 도량 갖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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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한·일관계 막후 60년 최서면의 충고

독도 영유권 갈등이 불거진 2005년 4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일본 국회의원들의 요청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설명하면서 ‘독도는 일본 땅’ 주장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 갈등이 불거진 2005년 4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일본 국회의원들의 요청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설명하면서 ‘독도는 일본 땅’ 주장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얼마 전 필자의 손에 『최서면에게 듣다』란 이름의 두툼한 책 2권이 배달됐다. 2011년부터 7년에 걸쳐 이뤄진 구술 회고가 최서면(92) 국제한국연구원장의 구술회고록이 뒤늦게 빛을 본 것이다. ‘한일관계 막후 60년’이란 부제 그대로 최서면은 해방 정국의 한가운데 뛰어든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일 관계의 현장을 지켜본 산 증인인 동시에 때로는 무대 뒤에서 그 어느 연출자나 연기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 막후 주인공이었다. 악화 일로인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가 이 원로의 회고록 갈피마다 깃들어 있다.

돌팔매 각오한 사토 방한 끌어내고 #기시·후쿠다 총리와 두터운 친분 #전방위 인맥, 한·일 메신저 역할 #고비마다 소통 중개로 난제 해결

#1. 1967년 6월. 최서면의 도쿄 자택에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의 측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해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의 6대 대통령 취임식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측근은 “사토는 (총리가 되기 전) 박 대통령 취임식에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지금 정세가 별로 좋지 않다. (방한 반대) 데모가 일어나거나 돌멩이가 날아오는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냐”고 했다. “별일도 아닌 걸로 소동이냐”고 운을 뗀 최 원장의 답은 이랬다. “만에 하나 돌멩이가 날아오는 경우 ‘아, 오길 잘했다, 36년이나 일본의 지배를 받고도 그 나라 총리가 왔을 때 돌멩이 하나 못 던진다면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나라겠지만, 돌멩이를 던지는 그 기백을 보고 나는 돌아간다. 앞으로 힘이 되어줄 이웃나라로서 서로를 소중히 생각합시다’라고 한마디 하면 거꾸로 한국인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일본에서의 평가도 높아질 것이다.”

힘든 결단 끝에 이뤄진 사토 총리의 방한은 좋은 선례가 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가 현역 총리로서 각각 노무현·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 관행은 곧 깨어지고 만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는 ‘나의 조부(기시 노부스케)와 박 대통령의 부친(박정희)이 정말로 친했으니까 앞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툰 부총리를 보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다. 그건 싸움을 하러 간 것 아닌가.”

이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아소 다로 부총리가 박 대통령 면전에서 “한국과 일본은 역사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며 “침략이란 단어의 정의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 사실을 비판한 것이다. 취임 첫날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 이전부터 꼬인 한·일 관계가 개선될 리 만무했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왼쪽)와 담소하는 최서면. [중앙포토]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왼쪽)와 담소하는 최서면. [중앙포토]

#2. 어렵사리 성사된 사토 총리의 방한으로 형성된 신뢰관계가 결실을 보게 된다. 1969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사토 총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건넸다. “내 편지를 갖고 가서 답장이 없으면 당신은 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 한·일 외교는 그걸로 끝이다. 대통령 서한을 갖고 가니 당신은 이제부터 한국의 특명전권대사다.”

가나야마 대사는 그 길로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편지에는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번에도 안 된다고 했는데, 못도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가 어떻게 철을 만들어”라며 사토 총리가 난색을 표하자 “그렇다면 나는 임지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했다. 사토는 그날 밤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나 포항제철을 지원키로 뜻을 모았다.

최서면은 저승길까지 동행할 지기(知己)로 가나야마 대사를 꼽는다. 가나야마 대사의 묘는 한국의 최서면 가족 묘지에 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74년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또 한 번의 위기에 선다. 최서면은 전직 대사 가나야마와 힘을 모아 서울과 도쿄의 정계 인사들 간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메신저로서 수습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자민당 부총재가 조문 겸 진사사절로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를 만남으로써 양국 갈등은 수습의 길로 들어섰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운데)와 함께 한 최서면. [중앙포토]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운데)와 함께 한 최서면. [중앙포토]

#3. 당시 한·일 지도자 간 상호 배려의 깊이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974년 11월 뇌물 스캔들 여파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사퇴했다.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다음 총리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가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어느 날 최서면의 지인이 찾아왔다. “사흘 뒤 발표되는데 미키 다케오가 후임 총리로 지명될 것”이라고 알려줬다. 시이나 부총재 주재로 열린 극소수 회의의 결론이었다. 이를 시이나 재정(裁定)이라 부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최서면의 지인이 극비사항을 미리 알려준 이유는 이랬다.

당시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의 여파로 박정희 유신 체제에 대한 일본 여론이 극히 나빴다. (리버럴 계열인) 미키가 총리가 되면 한·일 관계가 더욱 나빠질 것이란 예상이 퍼져 있었는데, 이를 미리 알려 한국 정부로 하여금 대비책을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최서면은 즉시 한국으로 연락했고 박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미키 총리 내정 사실을 알게 됐다. 최서면과의 친분이 가장 깊었던 후쿠다는 결국 2년 후 총리가 됐다. 최서면을 매개로 박정희-후쿠다 간에는 깊은 신뢰관계가 구축됐고 10·26 전까지 한·일 관계는 순탄대로였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1970년대 한·일 관계의 막후에서 벌어진 셈이다. 최서면의 구술을 채록한 고하리 스스무(小針進) 시즈오카현립대 교수와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안중근의 유묵 ‘국가안위노심초사’를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반환받았다. [중앙포토]

안중근의 유묵 ‘국가안위노심초사’를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반환받았다. [중앙포토]

최서면 선생의 구술에서 느낀 점은.
“한·일 관계는 국제관계의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되며 인간관계라는 요소를 함께 놓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서면 선생이 일본에서 맺은 인맥은 일본인 연구자가 봐도 놀랄 정도다. 그가 한 일은 훗날을 위해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 보고서로 정리했지만 일본에선 출판되지 않고 이번에 한국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의 한·일 관계에 주는 교훈은.
“최서면 선생은 친일, 반일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분이다.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냉엄하면서도, 일본인으로부터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분이다. 최 선생의 지론처럼 비판은 하되 상대방의 시각도 고려하는 도량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양국 모두 내셔널리즘이 서로 강해지고 자기 입장에서만 역사를 보려 한다.”

한·일 관계는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이란 평가가 무색하지 않은 시기를 맞고 있다. 인적·경제적 교류는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양국 정부 간 신뢰나 관계 개선 의지, 국민 사이의 감정은 제자리걸음 때로는 뒷걸음질만 거듭하고 있다. 구순을 넘기고 병상에 누운 최서면 선생의 구술회고록이 하필 이 시기에 출간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반탁선봉에서 망명객, 현대사 연구자로 파란만장한 삶

올해 92세인 최서면 선생의 일생에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8·15 당시 연희전문 재학 중이던 그는 해방공간에서 학생단체를 조직해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승만과 김구로 나누어진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노선을 따르던 그는 북한에 있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과 반탁 공동전선을 펼치기 위해 38선을 넘어 밀입북하기도 했다.

백범의 비서였던 선우진(고인)은 생전 최서면을 ‘최초의 북파 공작원’이라 불렀다. 최서면은 “생존 한국인 가운데 김구 선생을 모시던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1949년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연루돼 실형을 살다 이듬해 출옥한 뒤에는 가톨릭총무원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사무총장이던 장면 전 총리의 비서를 겸했다.

가톨릭으로 귀의한 그의 운명은 1957년 급전한다. 자유당 정부가 장덕수 사건을 다시 문제 삼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도쿄의 국회도서관과 외교사료관에서 일제 강점기 사료들을 접한 그는 삶의 방향을 한국현대사 연구로 틀어 숱한 성과를 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고서점에서 발굴했고, 야스쿠니 신사 뒷켠에 방치돼 있던 임진왜란 당시의 북관대첩비를 찾아내 끝내 한국 반환이 성사되도록 했다.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란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일본 사료들도 다량 발굴해 학계에 전파한 것도 그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계와 학계, 언론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았고 한·일관계와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많은 자문과 도움을 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최서면에게 듣다』는 일본 연구자들에게 일본어로 구술한 것을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번역하고 세세한 각주를 붙인 것이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그의 일생을 담기에는 부족할 만큼 최서면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