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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만 산재" 2심 꾸짖은 대법…제주간호사들 10년만에 웃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3일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근무를 앞둔 간호사들이 보호구 착의실로 이동하며 격려하고 있다. 대법원은 29일 간호사들에게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뉴스1]

13일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근무를 앞둔 간호사들이 보호구 착의실로 이동하며 격려하고 있다. 대법원은 29일 간호사들에게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뉴스1]

중증 환자에게 줄 약을 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뱃속 아이에게 치명적인 약품을 흡입한 산모들이 있었다. 집단 유산율이 40%, 심장 질환아를 출산할 확률이 평균 대비 14.6배에 달하는 환경에 놓였던 제주의료원의 간호사들이다. 그중 실제 심장질환아를 낳은 네 명의 간호사들이 업무상재해(산업재해)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29일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제주의료원의 비극이 발생한지 10년만, 소송이 제기된지 6년만에 나온 판결이다.

심장병 질환 아이 출산한 간호사들, 산재 인정받아

대법 "엄마와 아이는 한 몸이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심장질환아를 출산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한 요양급여신청반려처분 취소소송에서 정부의 손을 들어준 2심을 파기환송했다. 산재는 근무 중 부상과 질병에 걸린 근로자에게만 적용되고, 아픈 건 엄마가 아닌 아이라는 원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라며 "여성 근로자와 태아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업무상 재해로부터 충분히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2014년 간호사들의 손을 들어줬던 1심 판결의 취지와도 유사하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들이 지난 14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선천적 심장질환이 있는 아기를 출산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산업재해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들이 지난 14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선천적 심장질환이 있는 아기를 출산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산업재해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가 죽어야만 인정됐던 산재  

이날 판결은 대법원이 업무상 재해에 노출돼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도 그 피해를 인정한 첫번째 판결이라 의의가 있다. 이 전까진 근무 중 유산을 한 여성에게만, 그 인과관계가 있을 때 산재가 인정됐다. 아이가 죽어야지만 산재가 인정되는 현행법은 산재의 범위를 너무 좁게 봤다는 판단이다.

당연한 판결인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판결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법리가 만만치 않다. 현행법상 산재보험급여의 수급권자는 업무상 재해를 당한 근로자 본인이다. 이번 사례와 같이 일을 한 건 엄마인데 병에 걸린 것이 아이라면, 아픈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이 서로 다른 모순이 발생한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임신 중 아이와 엄마가 한몸일 때 질병이 발생했다"며 "이 당시에 엄마에게 발생한 산재급여의 수급권한은 출산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봤다. 모체와 태아를 분리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1일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대구 중구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근무 교대를 위해 보호복을 갖춰 입은 간호사 등 의료진이 격리병동으로 들어가기 전 주먹을 맞대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뉴스1]

지난 1일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대구 중구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근무 교대를 위해 보호복을 갖춰 입은 간호사 등 의료진이 격리병동으로 들어가기 전 주먹을 맞대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뉴스1]

제주의료원 비극의 시작

이 비극은 2010년 경영난에 처했던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며 임신한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을 하고,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하며 불거졌다. 유산율은 평균 대비 2배였고, 심장질환아 출산율은 12.7~14.6배에 달했다.

간호사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였다. 이듬해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제주의료원에 대한 역학조사를 벌였고 2012년 2월에 나온 연구결과는 충격적이었다. 2013년엔 한국산업언전보건연구원에서 추가 역학조사가 있었다. 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두 역학조사의 보고서 내용 중 일부이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 역학조사 보고서 中

서울대=간호사들은 약품 분쇄작업을 할 때 거의 대부분 장갑이나 마스크와 같은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았으며, 임신 중에도 분쇄작업을 수행했다. 제주의료원에서 사용된 약품들 중에 FDA X등급은 17종, D등급은 37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들 약품도 분쇄 과정에서 간호사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제주의료원에서 사용한 FDA X등급, D등급 약품들 약물을 파악했다. 프로스카(X등급, Finasteride)는 임산부가 접촉하면 태아의 남성생식기 기형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카마제핀(D등급, Carbamazepin)은 임산부가 복용할 경우 선천성 심장기형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지난달 9일 어깨를 주무르며 근무교대를 하러 가고 있다. 간호사들의 근무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연합뉴스]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지난달 9일 어깨를 주무르며 근무교대를 하러 가고 있다. 간호사들의 근무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연합뉴스]

여기에 더해 인원부족으로 인한 야간근무 증가와 휴식 부족 및 오염물 처리 등에 따른 감염 위험과 상사의 폭언, 환자의 욕설, 치매와 알콜중독 환자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학조사를 듣고 간호사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이날 대법원 판결까지 오게 된 것이다.

10년 전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엄마와 아이에게 병원은 아직도 일상이다. 제주의료원은 간호사들이 아픔을 겪은 뒤인 2011년부터 간호사들의 약품 분쇄작업을 폐지했다. 부윤정 한라대 간호학과 교수는 "간호사들은 임신을 한 뒤에도 고강도 근무를 피해갈 수 없다"며 처우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10년간 이 사건에 목소리를 내왔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당연한 판결이다, 노동자들이 산재를 산재로 인정받지 않는 아픔을 겪는일이 더 이상 없도록 할 것"이란 성명을 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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