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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꼭 직접 가야돼? 코로나 한방에 날아간 '20년 명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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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운영하는 선별진료소에서 로봇을 이용한 원격진료를 시행하고 있는 모습. 정부는 지난 2월24일부터 원격 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사진 명지병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운영하는 선별진료소에서 로봇을 이용한 원격진료를 시행하고 있는 모습. 정부는 지난 2월24일부터 원격 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사진 명지병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대구·경북 지역. 지난 3월3일부터 4월16일까지 운영된 경북 경주시 농협경주연수원에 마련된 2생활치료센터에 머문 경증 환자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난생 처음 비대면 의료 상담을 받았다. 환자들은 문자 메시지로 온 사이트 주소에 접속해 각자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했다. 시간대별로 기침·권태감 등 증상과 체온을 기록하고, 심리상태(우울감·불안감·심리적답답함·자살충동)도 차곡차곡 입력했다. 원격화상 버튼을 클릭해 담당 의사와 화상으로 상담도 했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이 헬스케어 기업 소프트넷과 함께 개발한 개인건강관리(PHR) 시스템이다.

['코리아 아이러니' 원격의료 상]

치료센터에서 환자들을 돌본 손장욱 고대안암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의료진도 똑같이 사이트에 접속해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한 화면에 띄우고 함께 상의할 수도 있다”며 “병동이 클 경우 환자 상태를 보고 이상을 알아내는 동안 응급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모니터링과 상담으로 감염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경증환자 원격의료에 사용된 원격의료 접속 안내 문자 화면. 사진 소프트넷

코로나19 경증환자 원격의료에 사용된 원격의료 접속 안내 문자 화면. 사진 소프트넷

‘절대 불가’였던 국내 원격의료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0년 시범사업이 처음 시작됐지만 지지부진 해온 지 20년 만이다. 예고 없이 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이 결정적인 촉발제가 됐다.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물론 무증상 감염자로 인한 의료진 감염 위험이 커 ‘굳이 모두가 병원에 직접 가야 하나’라는 물음표가 사회 전반에 퍼졌다.

무엇보다 정부가 그동안 이해 관계자 갈등에 막혀 굳게 걸어 잠갔던 원격의료의 빗장을 풀 의지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가 금방 종식될 가능성이 낮아진 가운데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인이나 만성질환자 등을 보호하고, 침체된 경제의 돌파구가 될 만한 새로운 산업 육성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도 "비대면 의료 서비스" 강조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비대면 의료서비스(원격의료)나 온라인 교육 서비스 등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주목받는 분야를 발굴해 달라”고 말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도 이날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코로나 이후)'시대를 대비해 원격 의료 관련 규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하기로 했다. 윤성로 4차위 위원장은 “코로나19로 온라인 교육, 비대면 진료, 언택트 산업 등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면서 “4차위는 우리 사회의 디지털 혁신이 더욱 촉진될 수 있도록 규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원격의료가 의료계 안팎에서 오래 논란이 돼 왔지만 경쟁국의 추진 현황을 감안하면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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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국가 중 원격의료 허용한 곳.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OECD 국가 중 원격의료 허용한 곳.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코로나로 미국 비대면 진료 환자 170배 증가 

실제 원격의료는 코로나 사태를 맞아 세계 주요 국가에서 폭발적 수요를 보이고 있다. 2020년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격의료보고서에 따르면 OECD 36개국 중 26개국이 원격의료를 도입하고 있다. 이 중 미국은 1993년부터 원격의료협회를 설립해 전체 병원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 진료를 받는 환자수가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170배 이상 증가했다.

2014년 원격의료를 도입한 중국은 알리페이와 바이두 등 11개 업체가 참여해 ‘신종 코로나 온라인 의사상담 플랫폼’을 구축했다. 사용자가 가장 많은 ‘핑안굿닥터’의 경우 코로나 사태 이후 회원 수가 10배 증가해 11억1000명을 넘어섰다.

중국 최대 온라인 의사 상담 플랫폼인 '핑안굿닥터'의 의료 상담 근무센터 모습. 사진 핑안굿닥터

중국 최대 온라인 의사 상담 플랫폼인 '핑안굿닥터'의 의료 상담 근무센터 모습. 사진 핑안굿닥터

일본도 2015년 원격의료를 허용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때도 ‘코로나19 대응지원센터’ 앱을 통해 의료진 상담, 필요한 약물 요청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원격의료는 시범 서비스 실시 후 20년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난해 4월 세계 최초로 5G(세대) 이동통신 상용화를 이뤄낼 만큼 정보통신기술(ICT) 수준이 뛰어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나라가 ICT와 의료진 간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송해룡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한국에 맥박·혈압·체온 등을 측정할 수 있는 훌륭한 디지털 웨어러블(착용가능한) 기기들이 정말 많은데 규제에 묶여 원격의료에 사용할 수가 없다”며 “스마트폰과 정보기술(IT), 의료 분야를 선도하는데 원격의료는 못하는 한국을 보고 세계 의학계에서 미스터리라고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의사와 환자 간 국내 원격의료는 지난 2000년 강원도 보건진료소에서 시범사업 형태로 첫 발을 뗐다. 하지만 개인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계 반발과 의료 민영화를 우려하는 정치권의 반대에 규제로 묶인 상태다. 2010년 18대 2014년 19대, 2016년 20대 국회까지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줄줄이 무산됐다. 그나마 이어져 오던 시범사업도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강원도를 디지털헬스케어 규제자유특구로 지정했지만 참여 기업이 없어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

코로나에 "전화상담 한시적 허용" 했지만…

이 와중에 코로나19라는 비상 사태가 터지자 보건복지부는 "2월24일부터 환자가 전화 상담 또는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경증·무증상 환자를 치료하는 생활치료센터에선 원격 모니터링을 포함한 화상 원격의료가 허용됐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는 "정부에서 발표한 전화상담 및 처방을 전면 거부한다"고 밝혔다. 원격진료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격진료를 시행하는 것이 혼선을 가중시킨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수요는 적지 않았다. 복지부에 따르면 전화 상담 처방이 시행된 이후 지난 12일까지 전국 3072개 의료기관에서 총 10만3998건의 처방이 이뤄졌다. 전화 상담과 처방에 응한 병의원 10곳 중 약 6곳(57.6%)은 동네 의원들이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개운리 보건진료소에서 고혈압 환자 김영숙 씨(오른쪽)가 원격의료 시스템을 통해 김용빈 공중보건의 진료를 받고 있다. 의사가 김씨 의 혈압·혈액을 검사한 뒤 결과를 시스템에 입력하면 공보의가 상담하고 약을 처방한다. 중앙포토

강원도 홍천군 동면 개운리 보건진료소에서 고혈압 환자 김영숙 씨(오른쪽)가 원격의료 시스템을 통해 김용빈 공중보건의 진료를 받고 있다. 의사가 김씨 의 혈압·혈액을 검사한 뒤 결과를 시스템에 입력하면 공보의가 상담하고 약을 처방한다. 중앙포토

원격의료는 코로나19와 별개로 고령 시대로 인해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 거주하는 이병철(73)씨는 “고혈압 약을 10년째 먹고 있는데 이걸 매번 타러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 가는 게 일이다. 버스 타고 먼 거리를 가서 의사 선생님을 1~2분 보고 오지만 그래도 직접 목소리로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된다”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의사 선생님 목소리를 듣고 약을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뇨나 고혈압, 심장질환 등 만성 질환자나 노인, 장애인의 경우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의료 접근성과 편의성이 개선되고 의료비도 줄일 수 있다는 평가다.

"원격 모니터링부터 단계적 허용을" 

의료계에선 원격의료의 단계적 허용을 제안하는 목소리가 높다. 송해룡 교수는 “원격 모니터링을 먼저 시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면서 "고령 환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 집 안이나 마을 단위에 원격진료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추는 게 고령화 시대를 준비하는 데 필수”라고 말했다. 의사협회 등에서 우려하는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의 경우 합병증이 없는 만성질환의 원격의료는 1차 의료기관(개인병원)과 2차 의료기관(전문병원)에만 허용해 주는 식으로 질병의 정도에 따라 범위를 제한하는 방안 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연수 서울대학교병원장은 “(여력이 되는) 상급 병원이 원격의료 플랫폼을 만들어 전국 의료기관이 함께 사용하는 구조가 이상적”이라고 조언했다. 이 플랫폼을 이용해 대형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도 1·2차 의료기관이 상급병원의 중증·희귀·난치 질환 노하우를 공유해 같이 치료하고 모니터링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원장은 “원격의료 도입 여부는 국민건강과 의료접근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 결국 환자와 국민에게 이익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했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한시적으로 허용한 전화상담과 처방은 고도화된 원격기술은 아니지만 ‘대면 진료’의 원칙을 넘어선 획기적인 변화이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여는 상징성이 있다”며 “원격의료 규제 완화는 관련 기업이나 의료기관만을 위한 게 아니며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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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아·최선욱·박형수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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