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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4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6면

〈장원〉

접속 
-박민교

앞과 뒤의 맥락이 끊겨서는 안 된다
밀도 없는 말은 원관념을 넘어서고
방임도 두기로 한다 둘 다 설 수 있을 때까지

양단(兩端)이 대치하는 즉흥적 설정으로
경계를 넘지 못하는 밀폐된 혼잣말
가두고 있어야 하는가 미열을 앓듯이

사랑의 보조관념은 미완의 기교일 뿐
한정된 온도로 최후를 증명한다
동시에 하나로 모인다 절정에서 맞닿는다

◆박민교

박민교

박민교

1967년 서울생.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동양철학 전공 석사.

〈차상〉

사의재*를 읽다 
-김숙

유배로 울타리 친 적막한 세상 뒤쪽
포구를 당겨 놓은 기억의 저 편에는
시대에 표류를 했던 한 사내가 보인다

눈 붉은 위리안치 문뱃내 뱉고 있고
주모의 죽비 소리 초당을 깨워간다
적소를 적신 어둠에 베갯잇이 젖는데

목민의 뜨거운 꿈 기지개 켜려는가
갈증이 잦추러 대는 꼿꼿한 붓끝 너머
조선의 어둑새벽이 희붐하게 열린다

*다산이 강진 유배 초기 4년간 머물렀던 주막집

〈차하〉

폐업
-김현숙

멈춰 선 조리기구 불 꺼진 조명 간판
금전수 된서리에 시한부로 누워있고
뻘쭘한 ‘대박나세요’ 흙바람에 나부끼네

〈이달의 심사평〉

밤바람이 다소 드세긴 해도 눈부신 4월이다. 이달 장원은 박민교 씨의 ‘접속’이다. 언어의 원관념이 비유의 과정이 되는 보조관념을 거쳐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잘 나타냈다. ‘앞과 뒤의 맥락이 끊’기지 않고 ‘한정된 온도로 최후를 증명’하기까지를. 이는 또 열고, 펼치고, 맺는 시조의 전개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의 다층적 매력을 잘 나타내었다.

차상은 김숙 씨의 ‘사의재를 읽다’다. 목민심서 탄생 비화다. 시대를 아파하는 180년 전의 다산을 소환해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목소리도 기승전결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무척 안정적이다. 첫 수는 기, 둘째 수는 승, 셋째 수는 전과 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적 전개 논리가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차하는 김현숙 씨의 ‘폐업’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더 많이 보이는 가슴 아픈 현실을 짧고 강렬하게 그렸다. 거기 있는 식물이 ‘금전수’라 더 슬프고 나부끼는 깃발에 적힌 글씨가 ‘대박나세요’라 더 아프다. ‘멈춰 선 조리기구’나 ‘불 꺼진 조명 간판’과의 선명한 대비가 주는 효과다. 조우리, 최영근, 남궁증 씨의 작품들도 한참 논의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김삼환, 강현덕 (심사평: 강현덕)

〈초대시조〉

징검다리를 건너며  
-임영석

1.
나, 이 세상 살아가며
남에게 등 구부려

구부린 등 밟고 가라고
말해 본 적 한 번 없다

그런데 이 징검다리
목숨까지 다 내준다

2.
물의 옷 위에 채운
단단한 돌의 단추

물의 옷을 벗기려면
풀어야 할 단추지만

아무도 이 물의 옷을
벗겨가지 않는다

◆임영석

임영석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 추천으로 등단『배경』 『초승달을 보며』 『꽃불』 『고양이 걸음』 등의 시조집과 다수의 자유시집 간행. 시조세계문학상,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강원문학상 등 수상.

작자는 원주의 치악산 밑에서 외롭게 엎드려 시조와 자유시를 함께 써온 시인이다. 그는 세속세계에 발걸음을 뚝 끊고 지내고 있고, 문단 행사에 나타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만큼 세상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사람도 매우 드물지 않을까 싶다. 줄잡아 15년 동안 ‘한결 추천 시 메일’을 통해 평(評)을 단 시조나 시 한 편씩을 날마다 세상에 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며’는 ‘1’과 ‘2’ 두 수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를 바꾸어 ‘2’에서는 무엇보다도 징검다리를 ‘물의 옷에 채운 단추’에 비유한 비유 그 자체가 탁월한데다, 상상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내 생각을 미주알고주알 밝히기 보다는, “내 시는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부여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폴 발레리의 말을 답변으로 들려주고 싶다.

‘1’에서는 통렬한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의 함의를 짙게 내포하고 있다. “나, 이 세상 살아가며”라는 첫 구절에서 ‘나’ 뒤에 쉼표 하나를 찍어 ‘나’를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게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등을 구부리고 다른 사람에게 밟고 가라고 말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징검다리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에게 등을 구부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던지는 희생과 봉사의 아이콘 징검다리를 밟고 강물을 건너가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자기반성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토록 험한 세상에 날마다 따뜻한 시 한 수씩을 퍼 나르는 시인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을 시의 세계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아닌가 몰라.

이종문(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 편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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