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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 칼럼니스트의 눈

대한민국이 페론이즘의 렌즈로 정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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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포퓰리즘을 쏘다 ④ 후안 페론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편지 한 구절을 인용한다. 때는 1952년. 발신은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이고 수신자는 이바네스 델 캄포 칠레 대통령 당선자다.

“아무리 퍼줘도 경제 안 망한다” #남미 포퓰리즘의 진짜 원조 페론 #‘거짓 약속’ 판명 난 지 이미 오래 #“한국은 따라 했다간 금세 폭망”

‘친애하는 벗이여.

국민, 특히 근로자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시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준 것 같아도 더 주십시오. 곧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경제 붕괴라는 망령으로 놀래키려 할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거짓말입니다. 경제보다 신축성이 좋은 것도 없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두들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세바스티안 에드워즈)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 그는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뿌리다. 페론은 “아무리 퍼주어도 결코 경제가 망하지 않는다”는 가짜 신화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그의 호언은 이미 ‘20세기 최대의 거짓 약속’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멸종을 거부하는 좀비처럼 영향력은 더 세졌다. 중남미 대부분 지도자가 그를 추종했다. 21세기 들어선 더 많은 세계 지도자가 그를 배우고 흉내 낸다. 그의 이름을 딴 페론이즘은 정치·경제학의 중요 연구과제다. 반(反)페론이즘, 신(新)페론이즘까지 등장했다. 그럼에도 페론이즘이 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몇 가지는 분명하다. 페론이즘은 경제 모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페론이즘의 대표적 특징이 성장과 소득 재분배를 강조하되 그 부작용인 인플레이션이나 재정 적자, 대외 압박은 외면하는 것이다. (‘페론이즘의 변천과 아르헨티나 경제 모델의 평가와 전망’ 2007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하상섭) 태생부터 한쪽 눈을 감고 시작한 셈인데, 그럴만한 이유도 있다. 페론이즘은 페론 개인의 생각과 실천을 통해 발전했다. 애초 정교하게 설계된 정책이나 시스템으로 출발한 게 아니다.

한병길 전 아르헨티나 대사(2012~ 2014년)는 30여년 외교관 경력의 대부분을 중남미에서 지낸 전문가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에서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보다 100배는 더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 공7과3 또는 공8과2로 대개 결론이 났다. 하지만 페론의 공과는 여전히 안갯속”이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좋은 것, 잘 되는 것, 국민에 퍼주는 것은 모두 페론이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한 전 대사는 “싫든 좋든 옳든 그르든 페론이즘을 세계사의 큰 조류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스페인 정복자)’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있다. 소수의 스페인 망명 귀족이 군부·귀족·성직자 같은 지배계층이 돼 부를 독식했다. 이걸 막고 노동자에게 부를 나눠주겠다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페론이다. 페론이즘이야말로 아르헨티나 국민에겐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하는 종교와 같다. 80년대엔 페론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힘을 얻기 위한 페론의 선택은 ‘퍼주기’였다. 최저임금·유급휴가 제도를 도입했고 해고금지법을 만들었다. 연금 혜택을 확대해 소득의 8%를 연금 보험료로 걷고 은퇴 후 소득의 82%를 연금으로 수령하게 했다. 연금 지급은 47세부터였다. 세상에 유례없던 노조 친화정책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노동의 정치화, 노동자의 세력화가 이뤄졌다. 42년 54만7000명이던 노조원은 47년 150만명, 페론 집권 말기인 54년엔 604만명으로 급증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군부·가톨릭·여성·중산층 등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내면서 51년 선거에선 62%의 사상 최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목표로 노동자에 무료 휴양소와 주택 제공, 휴가 상여금을 줬으며 무료 의료 정책을 실시했다. 47년부터는 ‘경제 독립’을 내세워 외국계 기업과 철도·가스·전화·전기·조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포퓰리즘의 원형질 대부분이 이때 페론에 의해 만들어졌다.

페론의 노조 친화정책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 모델을 흉내 냈다는 게 정설이다. 그는 주이탈리아 대사관의 무관 생활을 통해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깊이 학습했다. 파시즘은 조합주의를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는다. 사회의 각 직업을 몇 개의 조합으로 조직한 후 합의를 통해 국정을 결정한다. 이를테면 노조·시민단체가 정치를 주도하는 식이다. 파시즘에는 산업화, 민족주의적 보호무역, 군사화된 정부의 안정적 사회 통제가 부록으로 따라온다. 페론도 이에 맞춰 항공 우주 산업과 원자력 발전을 시작했다. 미국과 상대하려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페론의 거짓 약속, 페론이즘의 결말은 누구나 아는 그대로다. 1913년 세계 7위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세계의 골칫거리가 됐다. 58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22차례 받았다. 국가 부도를 선언한 것만 8번이다. 요즘 상황도 최악이다. 국가부채는 3230억 달러에 달하고 물가는 지난해 53.8% 치솟았다. 이르면 다음 달 9번째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이 나올 수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갚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은 없다”며 해외 채권단에 652억 달러의 외채 중 원금과 이자 415억 달러를 깎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가 부도가 상습화되면서 디폴트 선언을 채무탕감용 전략·전술로 사용한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판이다.

아르헨티나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페론의 후예로 불리는 메넴 카를로스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적 긴축을 통해, 키르치네르 부부 대통령 때는 중국발 원자재 호황 덕에 8~9%의 높은 성장률로 경제 재건의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잠깐 호황을 더 많은 ‘퍼주기’ 기회로 삼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떨어졌다. 단기 호황→페론이즘식 퍼주기 →재정 적자→부채 증가→통화 증발→하이퍼 인플레이션→국가 부도→긴축→국민 반발→다시 퍼주기. 이른바 페론이즘의 무한 반복에 빠진 것이다.

한병길 전 대사는 페론이즘의 가치와 효용을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단호하다. “한국은 아르헨티나 따라 하면 금세 망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니까 1세기 가까운 페론이즘을 버텨냈다. 원유부터 온갖 광물이 나오고 농업 강국이다. 남한의 27배 면적에 인구는 4500만으로 더 적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전혀 다르다. 페론이즘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30년 남미 포퓰리즘을 체험한 직업 외교관의 염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와 4·15 총선을 빌미 삼아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페론이즘의 렌즈로 정치를 보기 시작했다.

페론이즘의 문을 연 4·15 총선

4·15 총선은 여러모로 역사적이다. 한국에서 페론이즘이 본격 신호탄을 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정부는 물론 여야가 대놓고 현금살포 경쟁을 벌였다. 180석의 거대 여당, 보수의 몰락, 정치 지형의 변화, 주류 세력의 교체도 이에 비하면 사소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서울 광진을 유세 때 “고민정 후보가 되면 긴급재난지원금을 국민 모두에게 지급하겠다”고 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국민 1인당 50만원씩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그러자 여당 대표는 그다음 날 “전 국민을 보호할 대책을 내겠다”고 했다. 소득 하위 70%만 주겠다던 재난지원금은 1주일 만에 전 국민에 지급으로 바뀌었다.

지방정부도 가세했다. 강원도는 13일 취약 계층 30만 명 중 11만6000명에게 우선 1인당 40만원씩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부산 해운대구는 14일 전 구민에게 1인당 5만원씩, 대전시는 17만 취약 가구 중 1727명에게 우선 30만~70만원씩을 주기로 했다.

포퓰리즘은 마약과 같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강도도 더 세진다. 한 번 돈맛을 본 유권자는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페론 대통령은 1952년 “내게 표를 몰아주면 연금을 더 많이 늘려주겠다”고 공약해 아르헨티나 대선 사상 최대 득표율을 기록했다. 페론의 후예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11년 대선을 앞두고 한술 더 떠 “학생 300만에 노트북을 나눠주는 ‘평등한 연결’” 공약을 내놨다. 국민이 뿌리치지 않으면 포퓰리즘의 마약은 나라 곳간을 거덜 내고 아이들의 미래를 망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멀리 있지 않고, 페론이즘은 남의 일이 아니다. 4·15 총선이 망국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