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에도 윤리가 있다…착한 향수 바람

중앙일보

입력 2020.04.26 11:02

업데이트 2020.04.28 19:45

지속 가능한 향수. 향이 오래 지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환경에 영향을 최소화한 친환경 향수라는 뜻이다. 지속 가능한 향수의 핵심은 성분이다. 향수를 구성하는 향료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출되었는지, 윤리성을 따진다. 향료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과도하게 영향을 주지는 않는지, 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노동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지 등을 살핀다는 얘기다.

지속 가능성이 최대 화두가 된 뷰티 업계. 향수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 아니마빈치 인스타그램

지속 가능성이 최대 화두가 된 뷰티 업계. 향수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 아니마빈치 인스타그램

“윤리적이지 못한 럭셔리는 진정한 럭셔리가 아니다”

스위스 보석 브랜드 ‘쇼파드’의 최고 경영자 파트리지오 스텔라(Patrizio Stella)의 말이다. 쇼파드는 시계와 보석을 생산할 때 100% 윤리적 금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향수를 제조할 때도 윤리적인 원료를 사용했는지를 살핀다. 쇼파드는 스위스의 향료 회사인 ‘피르메니히(Firmenich)’의 지속 가능한 원료 공급 프로그램을 통해 공급되는 윤리적 향료로 향수를 만든다. 핵심 원료의 경우 직접 공급처를 찾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출시된 쇼파드의 향수 컬렉션인 ‘정원의 왕(Kings of garden)’의 경우 쇼파드 팀은 핵심 원료인 침향(OUD)을 7세대에 걸쳐 생산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한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쇼파드 '정원의 왕.' 핵심 원료로 방글라데시의 침향(OUD)이 사용된다. 사진 쇼파드 홈페이지

쇼파드 '정원의 왕.' 핵심 원료로 방글라데시의 침향(OUD)이 사용된다. 사진 쇼파드 홈페이지

럭셔리 브랜드의 향수는 대부분 거대 향료 회사에서 가져온 향료를 복잡한 비율로 섞어 만든다. 그래서 브랜드 스스로가 원료의 윤리성을 체크하기는 쉽지 않다. 보통은 쇼파드처럼 향료 회사와 함께 협업해 진행한다. 독일의 명품 브랜드 몽블랑도 지속 가능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향료 업체 지보단(Givaudan)과 파트너십을 맺고 ‘공유 가치를 위한 소싱 프로그램’을 만들어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원료를 공급받는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향수 원료를 주로 생산하는 인도네시아의 섬에 도서관을 짓는 등 현지 생산자를 지원하는 일도 한다.

향료 업체 지보단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원료를 공급받아 완성된 몽블랑 익스플로러. 사진 몽블랑 홈페이지

향료 업체 지보단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원료를 공급받아 완성된 몽블랑 익스플로러. 사진 몽블랑 홈페이지

향료 업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윤리적 재료를 구하는 브랜드도 있다. 영국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는 향수를 만들 때 필요한 원료의 생산지를 직접 찾아 친환경 농법을 장려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윤리적 재료 구매’ 방식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 향수에 흔히 사용되는 파촐리 오일은 인도네시아 북 수마트라의 한 지역에서 활발히 생산되는데, 이곳에서는 전통적으로 열대 우림을 불태워 밭을 만든다. 러쉬는 현지 환경 단체와 협력해 영속농업 센터를 설립해 지역 농부를 교육하고 훼손된 땅을 복원하며, 나아가 경사로의 화전 개간으로 인한 산사태의 피해를 줄이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러쉬의 '퍼퓸 라이브러리.' 공정한 방식으로 직접 공급받은 원료로 만든 30여가지의 지속 가능한 향수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 러쉬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러쉬의 '퍼퓸 라이브러리.' 공정한 방식으로 직접 공급받은 원료로 만든 30여가지의 지속 가능한 향수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 러쉬

향수 브랜드 ‘클린’은 지난 1일 친환경 향수 컬렉션인 ‘리저브 컬렉션’을 출시했다. 총 6가지 제품으로 구성된 컬렉션으로, 아이티, 브라질, 과테말라 등 전 세계에서 수확된 지속 가능한 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리저브 컬렉션 중 하나인 아쿠아 네롤리는 브라질에서 공정한 방식으로 수확하고 추출된 만다린 오일이 들어있다. 아이티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된 베티버를 공급받아 향수에 사용하며 아이티 지역 사회에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향수 브랜드 '클린'은 친환경 향수 컬렉션 '리저브 컬렉션'을 출시했다. 사진 씨이오인터내셔널

향수 브랜드 '클린'은 친환경 향수 컬렉션 '리저브 컬렉션'을 출시했다. 사진 씨이오인터내셔널

이 밖에 모로코에서 오렌지 꽃 오일을 생산하는 저소득 여성을 지원하는 지속 가능 향수 브랜드 ‘사나 자딘’(Sana Jardin), 동물 실험하지 않는 유기농 소이 왁스와 100% 천연 에센셜 오일, 면으로 된 심지 등을 사용해 향초를 만들고 수익금을 꿀벌 보호 단체에 기부하는 프랑스 향초 브랜드 ‘루메’(lume), 비영리 환경 단체와 함께 아마존 부족을 지원하면서 원료를 공급받는 향수 브랜드 ‘아니마 빈치’(Anima Vinci) 등이 있다.

향수 브랜드 사나 자딘은 모로코에 협동 조합을 설립, 지역 여성들이 오렌지 꽃 향료를 납품하고 남은 부산물로 양초를 만들게 하는 등 경제적 독립을 지원한다. 사진 사나 자딘 인스타그램

향수 브랜드 사나 자딘은 모로코에 협동 조합을 설립, 지역 여성들이 오렌지 꽃 향료를 납품하고 남은 부산물로 양초를 만들게 하는 등 경제적 독립을 지원한다. 사진 사나 자딘 인스타그램

환경에 영향을 적게 주는 원료를 채취해 향수를 만드는 것이 지속 가능한 향수라면, 자연에서 온 천연 원료가 아닌, 아예 실험실에서 만든 합성 향으로만 향수를 만들면 어떨까. 실제로 최근에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자연의 향기를 모사한 합성 향으로 지속 가능성을 타진하는 경우도 있다. 향기 회사 센토리의 김아라 대표는 “최근에는 생화가 뿜어내는 향기가 퍼진 공기를 포집해 연구실에서 완전히 같은 향기로 재현하는 ‘네이처 프린트’ 또는 ‘헤드 스페이스’ 기술을 활용해 향수를 만들기도 한다”며 “실제 장미는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공기 중에 퍼진 장미 향기를 인공적으로 똑같이 합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必환경 라이프? 지속 가능한 향수(sustainable fragrance)

이처럼 실험실에서 만드는 인공 향이나합성 향이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만든 향수가 무조건 친환경적이진 않다. 영국의 패션 잡지 ‘글래머’는 토양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합성 향료 생산은 천연 원료 생산보다 독성 폐기물을 더 많이 발생시킨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향수의 원료인 천연 에센셜 오일은 환경에 무해한 압착법이나 증기 증류법을 통해 만들어지며 이 과정에서 환경오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향수 편집숍 ‘메종드파팡’을 운영하는 김승훈 대표는 지속 가능한 향수의 맹점을 지적했다. 김 대표는 “향수 한 병을 만드는 데 에센셜 오일이 90여 종 이상이 섞인다”며 “이 중 한두 가지 재료를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채취해 가져온 뒤 친환경 향수로 홍보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성과 윤리성이 브랜드의 진정성 있는 철학이 아닌, 마케팅 도구로 활용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료가 아닌 포장재에서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재활용이 어려운 향수병을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단순하게 만들거나, 리필용 향수를 제안하는 식이다.

향수 브랜드 ‘클린’의 친환경 향수 컬렉션 ‘리저브 컬렉션’은 재활용 가능한 유리병과 환경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벌목된 오크 나무 캡을 사용하고, 독성이 없는 소이 잉크로 글씨를 새겼다. 또한 옥수수 추출물로 만들어 생분해 가능한 셀로판 포장지를 사용한다. 영국 친환경 향수 브랜드 ‘플로럴스트리트’(Floral Street)는 계란 상자 같은 생분해성 종이 펄프로 향수를 포장한다. 프랑스 브랜드 ‘랑콤’은 지난해 향수 ‘이돌’(idole)을 출시하면서 최초로 리필 정책을 펼쳤다. 다 쓴 향수병을 매장에 가져가면 할인된 가격으로 기존 향수병에 향수를 담아올 수 있다.

생분해되는 펄프로 포장재를 만든 '플로럴 스트리트.' 사진 플로럴 스트리트 인스타그램

생분해되는 펄프로 포장재를 만든 '플로럴 스트리트.' 사진 플로럴 스트리트 인스타그램

의식 있는 소비, 일명 착한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향수 한 병에도 윤리가 담기는 이유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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