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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두문불출 김정은…통치력 잃었을 수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북한 매체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108번째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에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 태양궁전에서 참배했다는 보도를 내보내지 않았다. 참배 불참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이 참배했다는 보도도 없었다. 김 위원장 명의의 화환이 놓인 모습이 공개됐지만, 태양절 당일에 공식적으로 전시된 것은 아니었다. 김 위원장이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화환을 보냈다는 보도 역시 없었다.

신변 이상이나 코로나 문제 아니라 #강경파에 의한 실권 가능성도 있어

일각에선 신변 문제가 생겨 불참했다는 추측을 내놓는다. 병석에 있다 해도 화환은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11일 정치국 회의 때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므로,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면 매우 급속히 문제가 발생했어야 한다. 병환 때문이라면 김여정을 대신 참석하게 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불참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 역시 가능성은 별로 없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고위 간부들이 금수산 궁전 참배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지도부에서 김 위원장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위험에 노출될 것을 염려했다면, 나이 많은 간부들이 집단으로 참배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최소한 외견상으로는 고위 간부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어떤 전문가는 김 위원장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업적 찬양을 점차 줄이고 위원장 자신을 더 부각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정말 그렇다면 김 위원장이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광명성절에는 왜 금수산을 방문했는가?

이러한 추측들이 설득력이 부족하므로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김 위원장 집권 뒤 북한 전문가들은 그가 실질적인 북한의 지도자인지, 아니면 명목상의 지도자에 불과하며 다른 배후 세력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골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 위원장은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고 의붓형을 암살하며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했다. 전문가들은 점차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라는 결론에 동의하게 됐다.

그런데 그 권력이 약화됐다면? 김 위원장은 많은 좌절을 겪었다. 그는 미국과의 외교에서 제재 완화를 달성하지 못했고, 경제 계획은 난관에 봉착했다. 인민군 장교들이 매달 10일 치 식량만을 배급받는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 사이에 북한의 외교라인이 달라졌다. 외무상은 강경파로 알려진 이선권으로 교체됐고, 외무성은 통일전선부에 주도권을 내줬다. 온건파로 분류된 이용호와 이수용은 해임됐다.

또한 최근 몇 주 동안 김 위원장은 평소만큼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다. 올해 초 6주 동안 김 위원장의 활동은 네 차례 보도됐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부각한 기념일인 2월 8일 건군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치적 동요 기미도 보인다. 4월 10일로 예정됐던 14기 최고인민회의 제3차 회의는 사전 설명도 없이 12일로 미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은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김 위원장이 ‘있는데도’ 강경 노선을 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어쩌면 미국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꺼리는 보수 인사들이 정책을 전복시키고 강경파 지지자들을 요직에 앉혔을지도 모른다. 김 위원장은 그가 영위하던 권력을 이제는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배후에 있는 강력한 보수 인사들이 그의 혈통적 정통성을 약화하려고 4월 15일 참배를 끈질기게 반대했을 수도 있다.

이런 추측에도 물론 한계가 있다. 앞서 언급한 다른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사실과 맞지 않을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통해 검증돼야 한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이 어느 정도라도 옳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존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