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우리 곁의 골드미스…요리교실로 만난 두 명의 J

중앙일보

입력 2020.04.24 15:00

[더,오래] 히데코의 음식이 삶이다(2)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26년 살았다. 현재 연희동에서 12년째 요리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언제나 그 계절의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조리법으로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와 요리를 가르친다. 음식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탄생한다. 음식을 같이 만들고 즐기고 치우는 과정이 삶이다. 독자들과 요리를 하며 축적했던 생각을 함께 나누려 한다. 〈편집자〉 

지우와는 서울시 문화예술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서대문 돈의문 프로젝트에서 ‘키친 레브쿠헨’이라는 오픈키친을 운영할 당시, 단발성 요리교실에 그녀가 참가하면서 알게 됐다. 퇴근하는 길이었는지 멋스러운 바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음, 이런 사람은 요리교실에서 배워봤자 집에서 만들 리가 없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왜 배우러 왔을까 의아함이 앞섰다.

지현은 돈의문 오픈키친 계약이 끝난 그해 가을 학기에 연희동 요리교실에 나타났다. 살짝 밀어도 날아갈 것만 같은 마른 체형으로, 차가 막혀 두 시간이나 걸렸다며 헉헉 숨을 헐떡이면서 뒤늦게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홈페이지로 수업을 신청하고 결원이 생길 때까지 2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거의 포기했을 때 내가 연락을 했다고. 소규모로 운영하는 연희동 요리교실은 오래 다니는 수강생이 많아 좀처럼 결원이 생기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수강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우와 지현은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도 다르고, 둘이 같은 수업을 들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 두 사람이 급속하게 친해진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의 일이다.
“선생님, 저희 어제 그 바에서 저녁부터 자정에 문 닫을 때까지 다섯 시간이나 앉아 칵테일을 열 잔 정도는 마신 것 같아요. 지현 언니랑 수다가 끊이질 않았어요. 제이 바텐더가 이제 문 닫아야 하니까 계산 부탁한다고 할 때까지요.”

평균 한국인 여성의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 높은 지우의 목소리가 휴대폰에 갖다 댄 귓속으로 울린다. 지우가 지현과 바에서 마셨던 지난 저녁에 우리는 연희동 아틀리에에서 유일하게 만들 수 없는 칵테일 만드는 법을 전문 바텐더에게 배우려고 장소를 옮겼다. 거기서 처음 만난 지우와 지현은 레슨을 받고 난 후, 그곳에서 계속 제이가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에 자신감과 자긍심이 있는 지우와 지현,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도 다르고, 같은 수업을 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두 사람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사진 pxhere]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에 자신감과 자긍심이 있는 지우와 지현,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도 다르고, 같은 수업을 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두 사람은 급속하게 친해졌다. [사진 pxhere]

그때부터 두 사람과는 각각 다른 수업에서 함께했고, 개인적으로 다른 모임을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칵테일 수업으로부터 2개월이 지났을 무렵, 이번에는 지현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얼마 전에 지우랑 칵테일을 꽤 마셨는데, 엄청 재밌었어요. 이번 주 토요일에 선생님도 같이 마셔요.”

늘 그렇듯이 수강생들에게 같이 놀자는 연락을 받으면 괜스레 기쁘다. 남편이 “그야 그렇지. 나이 든 사람이랑 놀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나이가 된 거예요”라며 타이밍 좋게 끼어든다. 한국에는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 부부는 종종 요리교실 수강생들이나 젊은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바에 가서 위스키를 마시곤 한다. 계절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연희동에 초대해 이웃집에서 따지러 오거나 순찰차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북적북적 왁자지껄 먹고 마신다. 그야말로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50세 다운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지갑을 언제까지 열 수 있을지, 열지 못하게 되면 모두 떠나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거리가 하나 늘긴 했지만.

지현의 메시지를 받고 서둘러 어디를 갈지 셋이서 마실 장소를 물색했다. 내가 장소를 정해야 할 때는 내가 가고 싶은 곳보다 함께 가는 사람의 나이, 미각, 술 등의 취향부터 라이프스타일까지 고려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 사십 대 싱글. 대학을 졸업하고 착실히 공부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온 일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느끼며, 출근 전 이른 아침에 테니스며 요가를 하는 등 내 입장에서 봤을 때 꽤 금욕적인 자기관리를 한다. 그리고 뼛속까지 주당인데다 술버릇도 좋다. 그런 지우와 지현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공간과 술 종류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저녁 여섯 시부터 칵테일 두 잔과 안주 세트에 맥주, 이탈리아 프로세코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단골 호텔 바를 예약했다.

“드디어 셋이 모였네. 건배!”
해 질 무렵, 청회색 빛 바깥 풍경이 보이는 카운터 석에 앉아 바텐더가 권하는 칵테일과 프로세코를 마시며 안주도 거의 먹어 치웠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알 테지만, 적당히 술기운이 돌면 일에 관한 이야기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 무겁지 않게 흘러간다. 별거 아닌 내용으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게 된다.

지우와 지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마흔을 되돌아봤다. “오십유오이지어학(吾十有五而志于学),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従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는 유명한 공자님 말씀이 있다. 한국 나이로 마흔은 ‘불혹’. 즉 현혹되지 않고 사물을 본다는 뜻이다. 나는 현혹되지 않는다기보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나이가 됐다고 해석하려 한다. 삼십 대엔 육아와 따분한 대학 일본어 강사 일에 쫓기면서 언젠가 요리교실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며 준비했다. 마흔이 되자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망설일 틈도 없이 연희동 요리연구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선생님, 내일 밤 그 호텔 바에 계세요?”
남편과 단골 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냐 물어본 것 같다.
“저, 내일. 제 생일인데 약속이 하나도 없어요.”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3월 중순, 밤늦게 지우와 지현이 함께하는 단체 메시지 창에 지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런.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있으려나 생각하며 재택근무 중인 남편과 요리교실 휴강 중인 나는 그럼 함께 내일 저녁 식사를 하자고 지우에게 답장을 보냈다.
“족발이랑 감자탕 맛있는 집이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할매집이란 곳이야. 그런데 두 사람은 소주는 별로려나?”

둘 다 회식이나 접대로 삼겹살과 소주는 자주 먹는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지우의 생일이니까 괜찮은지 물어봤다. 지현은 아쉽게도 그 시간엔 수술에 들어가야 해서 축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요리교실에서 만난 지우와 지현은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리지만 어릴 적부터 지켜온 신념으로 일관되게 노력하면 다양한 의미에서 인생이 결실을 맺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사진 piqsels]

요리교실에서 만난 지우와 지현은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리지만 어릴 적부터 지켜온 신념으로 일관되게 노력하면 다양한 의미에서 인생이 결실을 맺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사진 piqsels]

다음 날 저녁 일곱 시에 지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미슐랭 별 한 개라는 할매집에서 족발과 감자탕을 주문하고 남편과 오랜만에 소주를 마시며 두 시간을 기다렸다. 하필 그날, 지우는 M&A 계약이 걸린 중요한 회의가 끝나지 않아 5분마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현재 상황을 보고해왔다. 3인분이나 되는 족발과 감자탕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고, 2차에서 만나기로 한 지우를 위해 남은 족발을 포장했다.

결국 지우, 지현, 나 셋이서 처음 함께 마셨던 호텔 바에 돈의문 오픈키친에서 본 듯한 바지 정장을 입은 지우가 큰 서류 가방을 메고 등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만 사십 세라는 인생의 전환기와도 같은 생일에 나를 만나도 되나? 오히려 미안한 마음에 한마디 하며 그녀를 맞았다. 우리는 지우가 좋아하는 샴페인과 케이크로 만 사십 세 생일을 축하했다.

“내년 생일에는 꼭 남자친구한테 축하받아.”
지우도 지현도 싱글이지만 일이 너무 바빠, 아니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서인지 둘 다 남자친구가 없다.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뿐이에요.”
지현이 그렇게 말했던가. 바에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 결혼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두 사람 다 그렇게까지 외롭진 않은 것이겠지. 결혼을 여성의 의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도, 나는 이십 대 때부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향이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결혼이라는 형태를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리지만 어릴 적부터 지켜온 신념으로 일관되게 노력하면 다양한 의미에서 인생이 결실을 맺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사십 대에 들어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면 십 년 후의 지우와 지현은 더욱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십 년 정도 지나면 분명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을 거야. 외로움에 몸부림치게 될 테니 얼른 좋은 사람을 찾아봐.” 언니인 나는 취기가 돌면 언제나 두 사람에게 괜히 한마디씩 던져본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키친 크리에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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