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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콜레라 퍼지는데 가면무도회…1832년 파리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63)

고향 바르샤바를 떠난 21세의 쇼팽은 1831년 9월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자유로웠으며 가장 앞서가는 도시로 평가되고 있었다. 변방 출신의 쇼팽이 번화한 대도시에 안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듬해 2월 26일, 몇 달을 미룬 끝에 열린 그의 첫 번째 연주회는 실패였다. 그는 두려움 속에 낯선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며 생존의 길을 찾고 있었다.

파리를 휩쓴 콜레라 균을 그린 캐리커처. [사진 Wikimedia Commons]

파리를 휩쓴 콜레라 균을 그린 캐리커처. [사진 Wikimedia Commons]

그런데 바로 그 시절 파리에서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콜레라였다. 그것은 쇼팽과 몇 개월의 시차를 두고 파리에 도달했다. 쇼팽의 첫 연주회가 있기 정확히 일주일 전 파리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 괴질에 대해 무지했고, 아무도 그 병에 주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게 전염병이며 치명적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콜레라는 더 퍼졌다. 3월 22일에 가서 어떤 희생자가 보고되었을 때 의학자들은 조사에 들어갔고 29일 전염병으로 공식 확인했다.

그 콜레라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방식은 아주 극적이고 통렬했다. 병이 공식 확인된 29일은 맑은 하늘에 햇살이 좋았다. 그날 파리에는 오페라하우스가 주최하는 봄맞이 축제로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군중은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왔다. 병의 확산에 좋은 기회였다. 어떤 참석자는 콜레라를 가볍게 보고 콜레라균 복장을 차려 입고 나왔다. 독일 출신으로 파리에 와있던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그 축제와 이어지는 공포의 상황을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

그날 자정에 이르자 축제는 절정에 올랐다. 거리의 군중은 더 늘어났다. 음악이 있었고 난잡한 춤도 있었다. 흥에 들뜬 사람들은 길가의 찬물을 들이켰다. 그때 축제의 분위기를 이끌던 한 광대가 갑자기 다리를 절다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웃음이 그려진 가면을 벗자 얼굴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열이 오른 푸른색의 병자얼굴이었다.

광대들이 잇달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군중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수십 명이 파리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던 ‘오텔 듀 Hôtel Dieu’로 실려갔다. 광대들은 치료를 받을 틈도 없이 사망했고 우스꽝스러운 복장 그대로 묻혔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 일기는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 ’적사병 가면 the Mask of Red Death’에 차용되었다.

콜레라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는 뉴욕시 보건국의 삐라. 1832년. [사진 Wikimedia Commons]

콜레라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는 뉴욕시 보건국의 삐라. 1832년. [사진 Wikimedia Commons]

병원에는 쉴새 없이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모두 하루 이틀 사이에 숨을 거두었다. 콜레라는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맹위를 떨쳤다. 병의 확산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떤 날은 단 하루 사이에 200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100명의 희생자가 보고되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한 건물에서 하루에 2, 3구의 시신이 들려 나왔다. 시신을 담은 자루는 시장과 광장의 모퉁이에 쌓였다. 파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축제의 뒤끝은 음산한 냄새, 깊은 신음소리, 황량한 거리였다.

인도의 갠지스 강변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한편으로 중국, 조선, 일본으로 퍼져나갔고 다른 한편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우랄산맥을 넘어 러시아의 주요도시로 퍼졌었다. 그 병균은 1830년 11월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하는 폴란드인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러시아 진압군을 따라 바르샤바와 폴란드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파리로 밀어 닥친 것이었다.

묘하게도 그 콜레라는 쇼팽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것은 쇼팽이 그곳을 떠나고 한달 뒤였다. 그는 빈에서 머뭇거리다가 독일을 거쳐 파리로 왔는데 콜레라도 그의 뒷길을 따라왔다. 병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냥감을 대하듯 쇼팽이 있던 파리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 약 13000명의 사망자가 보고되었다. 9월에 들어 병이 가라앉았을 때는 인구 65만명의 파리에 19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뒤였다. 프랑스 전역에는 약 10만명이 희생되었다. 콜레라는 그 전 이미 영국을 공포에 몰아넣었었고 그 해 안에 미국 서해안까지 퍼졌다. 1800년대를 통해서 꺼질 듯 살아나고 꺼질 듯 살아난 콜레라는 세계적으로 수 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파리에서 주요한 피해지역은 불결한 뒷골목의 하층민 밀집지역이었다. 어떤 조그만 건물에는 수백 명이 몰려 살기도 했는데 위생은 엉망이었다. 당시 시민들은 오물을 도로에 그냥 버렸고 그 오물은 지하수를 더럽혔다. 오염된 지하수를 마신 사람들은 콜레라에 희생되었다.

병의 원인과 감염경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가운데, 전통적인 이론에 따라 공기를 타고 흐르는 더러운 기(氣)가 병을 일으킨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공기를 더럽히는 쓰레기 소각이 금지되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콜레라는 잦아들었지만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여름이면 어김없이 그 병은 돌아왔다.

런던 브로드 거리의 존 스노우 기념 펌프. 물을 긷는 손잡이가 없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런던 브로드 거리의 존 스노우 기념 펌프. 물을 긷는 손잡이가 없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콜레라의 전파에 물의 역할을 의심하는 과학적 보고서는 1854년에 가서 영국의 존 스노우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는 런던 소호 지역의 콜레라 발병 케이스를 연구했다. 그 지역 브로드 거리의 사망자 발생 건을 점도표로 만들어 본 그는, 그 거리의 한 지하수 펌프 인근에 콜레라 희생자가 몰려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펌프는 오래된 분뇨 통에서 가까웠고 더러운 생활하수에 오염된 상태였다.

그는 급히 그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하여 사용을 못하게 하였고, 더러운 물에 대한 지역사회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의 보고서는 전염병학계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또 한가지 그가 지적한 것은 맥주였다. 그가 조사해 보니 브로드 거리 인근의 어떤 사람들은 양조장에서 가져온 찌꺼기 맥주를 물 대신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발병률이 현저히 낮았다. (맥주의 주조과정에는 자연스러운 살균효과가 있다.)

유럽인들이 식사와 함께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광경을 요즘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콜레라가 가져다 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작용한 탓도 크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질병 탓에 긴 여름휴가의 전통도 강화되었다. 요즘 수돗물은 염소소독으로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을 예방한다.

콜레라의 대 확산은 유럽의 도시 행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이루어진 도시의 인구 밀집과 그에 따른 오폐수 처리와 불결한 환경을 개선하는데 모든 큰 도시가 힘을 쏟았다. 꾸준한 노력 끝에 파리의 도로는 넓어졌다. 차도주변으로 인도가 만들어졌고 차도 양쪽을 따라 하수도도 설치되어 더러운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는 등 파리의 도시 정비는 여러 대도시의 모범이 되었다.

초기 파리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쇼팽은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탓에 외출을 줄이고 소수의 친구만을 만나는 방법으로 질병의 계절을 보냈다. 깔끔한 성격으로 개인 위생조치는 남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여름에는 시골의 친구 집에서 머물며 전염병을 피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조르주 상드와 동거하면서부터는 매년 5월 상드의 고향 노앙으로 가서 여름을 보내고 10월경에야 파리로 돌아왔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빼어난 음악성은 감출 수 없어서 그의 진가는 금방 드러났다. 1832년 9월 전염병이 수그러들자, 특유의 단정한 용모와 세련된 매너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에 반한 부유한 귀족층이 그를 초대하기 바빴고, 그는 파리 사교계의, 요즘 말로 핵인싸[寵兒]가 되었다. 1834년 1월에는 자신이 대사, 공작, 장관들 등 유력한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았다고 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써 보냈다. 쇼팽의 경우는 어떠한 난관도 실력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프레데릭 쇼팽 서거 150주년 추모 폴란드 은화. 1999년 제작. [사진 송동섭]

프레데릭 쇼팽 서거 150주년 추모 폴란드 은화. 1999년 제작. [사진 송동섭]

신종 코로나가 우리의 생활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봄이 온 것도, 벚꽃이 핀 것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이 시간이 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코로나의 발병지로 의심되고 있는 중국은, 위축시킨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인지 병의 극복을 주장하며 병이 주는 경계심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의 다른 부분이 냉각되어있는데 한쪽 부분만 살아난다고, 이리저리 깊게 엮인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옛 유럽에서는 질병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심스러운 선박은 노란 깃발을 달고, 항구 밖에서 40일의 검역 기간을 보낸 후 하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이번 사태 초기에 중국을 위험 지역으로 경계하도록 조치를 하고, 그에 따라 다른 나라들이 모두 중국에 대한 봉쇄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중국의 피해는 있었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지금쯤 그곳도 코로나를 극복했다면, 그동안 나머지 세계는 그럭저럭 굴러갔을 테니 중국은 그 살아있는 생산·소비·물류의 체인을 타고, 모든 나머지 지역과 함께 좀 더 빠르게 정상화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현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이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 보통의 국제기구 종사자처럼, 순수 학자였다면 앞의 그 ‘만약’이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을 것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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