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1열이 사라졌다...코로나 시대 평등해진 패션쇼

중앙일보

입력 2020.04.24 11:00

구찌의 2020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이는 패션쇼 모습. 사진 구찌 홈페이지

구찌의 2020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이는 패션쇼 모습. 사진 구찌 홈페이지

패션쇼는 패션산업의 시작점이다. 쇼에서 디자이너가 새로운 상품을 보여주면 이를 바이어가 사들여 매장을 채우고, 기자들은 그해의 트렌드를 예측해 보도한다. 세계 각지의 바이어·기자들이 패션쇼를 보기 위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긴 비행시간을 투자해 밀라노·파리 등 주요 패션 도시로 몰려드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3월 파리 패션위크를 마지막으로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패션쇼가 모조리 취소된 상황. 과연 이렇게 패션쇼는 사라지는 걸까.

하이클래스 전유물 '럭셔리 패션쇼'의 변화

지난 4월 초 영국 패션 전문 매체 BOF와 컨설팅 그룹 맥킨지가 공동으로 발표한 ‘2020 패션 현황-코로나 업데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이번 코로나19로 유럽·북미의 상장된 패션회사 80 %가 금융 위기에 처할 것이며 향후 12~18개월 동안 많은 글로벌 패션기업이 파산 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금의 상황도 문제지만,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패션쇼가 모조리 취소된 것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됐다.
지난 2~3월 2020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발표하는 밀라노·파리 패션위크가 진행되는 동안 코로나19가 유럽을 덮쳤다. 밀라노 패션위크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되며 행사가 하나둘 취소되더니, 패션위크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패션쇼 당일인 2월 23일 오전 갑자기 '관중 없는 패션쇼'로 방향을 바꿔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이어서 열린 파리 패션위크에선 ‘샤넬’이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컬렉션 쇼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코로나 팬데믹에 서울패션위크가 취소됐고, 파리 패션위크는 매년 6월에 열렸던 남성복 패션위크를 취소했다. 밀라노 패션위크는 오는 9월 남성복과 여성복 패션위크를 함께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런던 패션위크 역시 지난 4월 21일 올해 6월에 있을 남성복 패션위크를 남성복·여성복 구분 없는 '젠더뉴트럴' 성격으로 진행하되 "모든 것을 디지털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뉴욕 패션위크는 역시 상황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에르메스' '구찌' '프라다' '막스 마라'는 5월 예정이던 크루즈 쇼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적어도 올해 여름까지 세계적인 규모의 패션쇼는 열리지 않을 전망이다.

상하이의 온라인 패션 주간에 방송된 실시간 스트리밍 스크린 샷. 사진 상하이 패션위크

상하이의 온라인 패션 주간에 방송된 실시간 스트리밍 스크린 샷. 사진 상하이 패션위크

답은 '디지털' 밖에 없다. 많은 패션 브랜드와 패션위크 관계자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패션쇼 대신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중국 상하이 패션위크는 발 빠르게 모든 행사를 디지털로 진행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티몰과 협업해 런웨이 쇼와 제품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디지털 쇼룸까지 진행했다. 이를 통해 150여 개의 브랜드가 컬렉션을 선보였고, 2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쇼를 시청하는 성과를 냈다.
사실 이미 몇 년 전부터 패션업계는 오프라인 패션쇼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2016년 가을·겨울 시즌 '톰 포드'와 '버버리'는 6개월 앞선 컬렉션을 선보이는 기존 패션쇼의 관행을 깨고, 쇼를 본 후 바로 매장에서 제품을 살 수 있는 '씨 나우 바이 나우'(See Now Buy Now) 형식의 패션쇼를 시도했고 지금은 하나의 패션쇼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구찌의 2020년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 원형 무대를 설치하고 360도 회전 카메라로 패션쇼 곳곳을 볼 수 있게 했다. 사진 구찌

구찌의 2020년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 원형 무대를 설치하고 360도 회전 카메라로 패션쇼 곳곳을 볼 수 있게 했다. 사진 구찌

AR·게임 등 디지털을 잘 활용하기로 정평이 난 '구찌'는 소수 초대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패션쇼를 대중에게 공개한 대표적인 브랜드다. SNS를 통해 쇼 시작 10분 전부터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쇼장에 초대된 셀럽 등 유명 패션 관계자들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지난 2020 가을·겨울 컬렉션 쇼에선 무대를 원형으로 설계해 백스테이지부터 본 무대까지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며 밀착 중계하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는 패션매체 WWD와의 인터뷰에서 “고객들은 더 이상 시즌 개념으로 패션에 접근하지 않는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가 중요하다. 디자이너들은 소비자가 런웨이에서 점찍은 아이템을 바로 구매해서 옷장에 챙겨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3월 14일 미국 패션 브랜드 '제임스 113'의 컬렉션 쇼 피날레 무대에서 디자이너가 "이것이 끝"(This is the end)라는 글귀가 새겨진 재킷을 입고 모델과 함께 퇴장하고 있다. 사진 AP=연합뉴스

지난 3월 14일 미국 패션 브랜드 '제임스 113'의 컬렉션 쇼 피날레 무대에서 디자이너가 "이것이 끝"(This is the end)라는 글귀가 새겨진 재킷을 입고 모델과 함께 퇴장하고 있다. 사진 AP=연합뉴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형태의 패션쇼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옷을 팔기 위해 모델에게 입혀 보여주는 처음의 목적에서 진화해, 지금은 멋진 무대 연출까지 곁들여 옷과 브랜드를 홍보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디지털 패션쇼는 꽤 매력적이다. 특히 비용 대비 많은 사람에게 컬렉션을 보여줄 수 있다는 면에서 상당히 효율적이다. 중국 신진 디자이너 앤젤 첸이 지난 3월 상하이 패션위크에서 개최한 라이브 스트리밍 쇼는 4만 명의 사람들이 접속해 쇼를 즐겼다.
특정 소수만이 누렸던 '프론트 로’라 불리는 관람석 1열이 가지는 힘도 사라진다. 누구나 손안의 핸드폰으로 세계 어디서나 좋아하는 브랜드의 쇼를 동시간대에 볼 수 있게 되는 '평등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지난 2월 중순 영국 런던에서 열린 빅토리아 베컴의 2020년 가을겨울 컬렉션 쇼 현장의 모습. 관람석 1열에 베컴 가족이 앉아 쇼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단발머리의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런던패션협회

지난 2월 중순 영국 런던에서 열린 빅토리아 베컴의 2020년 가을겨울 컬렉션 쇼 현장의 모습. 관람석 1열에 베컴 가족이 앉아 쇼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단발머리의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런던패션협회

하지만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패션쇼가 가지는 다른 의미도 커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패션 매체 보그 영국의 패션 디렉터 사라 해리스는 "컬렉션 쇼는 패션업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생각을 모으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종의 허브”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 편집숍 분더샵의 연문주 바이어도 "브랜드가 여는 오프라인 행사는 주문을 받기 위한 '움직이는 카탈로그' 역할보다는,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보여주는 공간과 음악, 분위기가 의상과 어우러지는 종합예술 행사"라고 말했다. 더구나 실제 주문이 이루어지는 건 쇼가 끝난 다음 날부터 열리는 '쇼룸'에서인데 여기선 모델이 입었던 옷을 직접 만져보고 입어도 볼 수 있다. 연 바이어는 "그런데 이 과정을 모두 디지털로 전환한다면 실물을 볼 수 없어 불안할 것"이라며 "아마도 많은 바이어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량만 주문할 가능성이 커서 패션 산업이 축소될 위험도 크다"고 말했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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