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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어벤져스, 메르켈은 있고 트럼프·아베는 없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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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의 인간혁명]코로나 리더십과 과학

과학계의 ‘어벤져스’가 모인 1927년 솔베이 회의. 참석자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탔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막스 플랑크와 마리 퀴리, 헨드릭 로렌츠, 알버트 아인슈타인. 둘째줄 맨 오른쪽은 닐스 보어, 셋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다. [위키피디아]

과학계의 ‘어벤져스’가 모인 1927년 솔베이 회의. 참석자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탔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막스 플랑크와 마리 퀴리, 헨드릭 로렌츠, 알버트 아인슈타인. 둘째줄 맨 오른쪽은 닐스 보어, 셋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다. [위키피디아]

등장인물·이론

알버트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1955) 베른의 특허심사관이던 26세 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는 특수상대성이론으로 과학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후 중력장방정식으로 불리는 일반상대성이론과 광자론, 통일장이론을 통해 현대물리학의 기틀을 다졌다.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6일간 토론 #과학의 왕좌는 이성·논리로만 차지 #17C 교회 ‘지동설’ 주장 학자 화형 #지금은 정치가 과학적 사고 배척

중력장방정식

중력장방정식

중력장방정식
뉴턴이 중력 현상을 발견했다면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원리를 규명했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중력이 시공간을 뒤트는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리해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명명했다. 훗날 빅뱅과 블랙홀 등을 설명하는 기초이론 중 하나가 됐다.

광자(光子)론

광자(光子)론

광자(光子)론
빛의 본질이 파동이라는 것은 오랜 불문율이었다. 반대로 뉴턴은 빛이 알갱이라는 가설을 처음 제시했고 아인슈타인이 규명했다.(1921년 노벨상) 광자론은 양자역학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입자인 전자도 파동의 성격을 갖는다.

코펜하겐 학파

코펜하겐 학파

코펜하겐 학파
닐스 보어(1885~1962)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 폰 노이만(1903~1957) 등이 주축이 된 학파. 원자 같은 미시세계의 물리량은 뉴턴역학에서처럼 확정된 값이 존재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양자역학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난민 신분으로 이주해 미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 사진)과 엔리코 페르미. [중앙포토]

난민 신분으로 이주해 미국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 사진)과 엔리코 페르미. [중앙포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시대적 명언이 나온 1927년 솔베이 회의는 ‘전자와 광자(光子)’가 주제였습니다. 빛도 입자라는 광자론에서 발전한 양자역학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행사였죠. 기부자의 이름을 딴 솔베이 회의는 물리·화학계의 권위 있는 행사로 이날 참석자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탔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신진 물리학자 그룹인 코펜하겐 학파의 양자역학 이론을 공식 인정하는 자리였습니다.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미시 세계를 다룹니다. 빛이 알갱이(광자)이듯, 입자도 파동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위치 등 정확한 상태를 규정할 수 없고 오직 확률로만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원자모형’으로 유명한 닐스 보어는 이를 원자에 적용합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주변을 도는 전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때 전자는 특정 궤도로만 움직이는데, 어느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가려면 그냥 뛰어넘어야(퀀텀점프) 합니다. 특히 전자 같은 미세 입자는 관측 시 광자에 부딪혀 상태까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어의 이론에 아인슈타인은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우주에는 명확한 인과법칙만 존재할 뿐, 확률과 같은 애매한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관찰 행위에 따라 대상의 실재가 바뀐다는 보어의 주장에 대해선 “달을 보지 않는다고 달이 없는 것이냐”며 강하게 비판했죠. 자연에는 명확한 ‘신의 뜻’이 있을 뿐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자모형.내부 원 안에 있는 것은 원자핵이며 세개씩 뭉쳐 있는 것은 쿼크들이다.외부 원에 있는 점은 전자들이다.

원자모형.내부 원 안에 있는 것은 원자핵이며 세개씩 뭉쳐 있는 것은 쿼크들이다.외부 원에 있는 점은 전자들이다.

그러자 보어는 과학계의 대선배에게 “신이 뭘 하든 그냥 놔두라”며 맞섰습니다. 곧바로 회의장은 아인슈타인과 보어·하이젠베르크 등 젊은 과학자들의 논쟁터가 됐습니다. 6일 동안 열린 회의에서 매일 아침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모순을 지적하는 문제를 냈고, 저녁이면 젊은 학자들이 해답을 내놨습니다.

과학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런 과정을 거쳐 양자역학은 더욱 정교해졌고 현대 물리학의 주축이 됐습니다. 반대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골리앗(아인슈타인)은 수많은 다윗들의 도전으로 명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죠. 질서정연한 우주를 설명하는 완벽한 법칙을 꿈꿨던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논리와 증거로 무장한 양자역학을 더 이상 거부하기 어려웠습니다. “양자역학은 주위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우리는 양자역학 없이 살 수 없다”는 김상욱 경희대 교수(물리학)의 말처럼 오늘날 양자역학은 반도체, 원자력, 양자컴퓨터 등의 핵심이론이 됐습니다.

과학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떤 권위적 이론도 반증이 나오면 왕좌의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논증과 논리만이 결정에 영향을 미치죠. 제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이론과 석학의 주장도 합리적인 반증 앞에선 무릎을 꿇습니다. 이처럼 현상을 탐구해 가설을 세우고, 논증과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적 사고’는 근대 문명의 발전에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역사, 과학과 신』에서 “17세기 과학혁명은 종교의 출현 이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성적으로 대안을 찾는 과학적 방식은 인류 역사를 급속도로 발전시켰습니다. 과학적 사고는 철학 등 인문학으로부터 여러 학문을 독립시켜 사회학·정치학·행정학·경제학·법학 같은 사회과학의 기틀을 다졌고요.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반면 과학적 사고를 가로막는 행동은 역사의 과오로 기록됐습니다. 1633년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과 함께 종교재판에 넘겨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0년 동안 구금돼 있다 옥사했습니다.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에 의해 화형당합니다.

훗날 가톨릭은 잘못을 인정합니다. 갈릴레이가 죽은 지 115년 만에 그가 쓴 『두 세계관의 대화』를 금서 목록에서 해제했고, 1992년 10월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죄했습니다.

종교와 과학이 다른 것은 신념과 실증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일단 ‘믿고 보는 것’이며, 과학은 ‘보고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신념을 재판대에 올리고, 과학은 실증으로 판결 내립니다. “언제든 새로운 증거로 부정될 수 있어야 과학”(칼 포퍼)입니다. 절대불변의 진리는 종교적 믿음에만 있기 때문이죠.

오늘날 과거 종교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정치입니다. 정치인들은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정략적 결정을 내리거나, 정치적 목표에 맞춰 전문가의 이야기를 짜깁기하고 통계를 다듬죠. 맹목적 팬덤을 활용해 비합리적인 결정도 서슴없이 밀어붙입니다.

기자회견 중 의료용 면봉 꺼내든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기자회견 중 의료용 면봉 꺼내든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최근 팬데믹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행태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7일 뒤늦게 긴급사태를 선언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아사히신문은 “올림픽과 경제 타격 등을 이유로 코로나19 검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올림픽을 1년 연기한 것도 자신의 임기(내년 9월) 안에 개최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니얼 퍼거슨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많은 학자들이 1월 말부터 경고했지만 당국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전문가를 싫어하는 아마추어”라고 비판했습니다.

트럼프는 지난 13일 기자회견 중 “뉴욕타임스는 완전히 가짜뉴스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태 초기 위험성을 경고한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을 무시했다는 신문 보도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죠. 그러면서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홍보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메르켈의 과학적 리더십

EU 정상회의 참석 중인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EU 정상회의 참석 중인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누구보다 과학적이어야 할 세계보건기구(WHO)도 중국을 의식한 초동 대처 미흡으로 비판받았습니다. 국내서도 논란이 된 마스크 착용 여부를 놓고 처음에는 ‘안 써도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꿨습니다. 의사들의 초기 경고를 무시하고 은폐하다 사태를 키운 중국의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과학으로 해결할 일을, 정치논리가 주도하며 벌어졌습니다. 과거의 종교처럼 정치가 과학을 무시하고 통제하면서 큰 비용과 희생을 치른 것이죠.

반대로 혼란스런 유럽에서 독일이 선방할 수 있던 것은 화학박사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공이 컸습니다. 그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과학과 증거에 근거해 정책을 폈습니다. 국민들에게 직접 ‘기초감염 재생산수’ 논리를 설명하는 등 이성적 리더십을 선보였죠.

과학이 발전하려면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과학에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과학과 인간의 가치』)의 말처럼 사상·비판의 자유, 이를 받아들이는 성찰적 지혜가 있어야 과학이 꽃을 피웁니다.

빅뱅 이론을 처음 제안한 조지 가모프와 원자폭탄의 아버지 엔리코 페르미는 각각 스탈린과 무솔리니의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이데올로기에 학문을 꿰맞춘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학자들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했죠. 아인슈타인, 한나 아렌트 같은 지식인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간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과학적 사고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자리 잡아야 역사가 진보합니다. 특히 복잡해진 현대사회는 리더 한 명이 모든 분야를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중요하고 복잡한 사안일수록 전문가 의견을 잘 듣고 과학적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트럼프·아베 같은 잘못된 판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과연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윤석만은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2018 세종도서),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