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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사냥의 시간'…마약·총성 얼룩진 '헬조선' 미래

중앙일보

입력

영화 '사냥의 시간'에서 주연을 맡은 이제훈. 영화엔 총격 장면이 많이 나온다. 15세 관람가. [사진 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에서 주연을 맡은 이제훈. 영화엔 총격 장면이 많이 나온다. 15세 관람가. [사진 넷플릭스]

범죄 액션보단 심리 스릴러에 가깝다. 총격장면이 많지만 슈팅 게임 같은 쾌감을 기대해선 안 된다. 가진 것 없는 어수룩한 청년들이 황폐한 서울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체 모를 적에게 육중한 산탄총을 쏘아댄다. 총탄만이 빛나는 무거운 어둠, 그 자체를 찍기 위해 만든 영화 같기도 하다.

총제 100억 대작 '사냥의 시간' #23일 넷플릭스 190개국 공개 #'헬조선' 만난 디스토피아 세계관 #추격전 쾌감보단 인물 돋보여

윤성현 감독의 영화 ‘사냥의 시간’이 23일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190여 개국에서 동시에 베일을 벗었다. 총제작비 100억원대 영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극장 개봉 없이 온라인 스트리밍(OTT)으로 직행한 국내 첫 사례다. 영화엔 경제가 파탄 난 가상의 근미래 한국에 대한 암울한 상상이 가득하다.

23일 넷플릭스가 영화 '사냥의 시간'을 세계 190여 개국에 동시 공개했다. 넷플릭스 홈페이지 위쪽으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하이에나', 영화 '킹덤' 등 한국발 인기 콘텐트가 노출돼 있다. [홈페이지 캡처]

23일 넷플릭스가 영화 '사냥의 시간'을 세계 190여 개국에 동시 공개했다. 넷플릭스 홈페이지 위쪽으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하이에나', 영화 '킹덤' 등 한국발 인기 콘텐트가 노출돼 있다. [홈페이지 캡처]

마약·총성으로 물든 '헬조선'

주인공은 절도죄로 수감됐다가 3년 만에 갓 출소한 준석(이제훈). 극한의 금융위기로 몰락한 세상에서 마지막 한탕을 노리던 그는 우직한 장호(안재홍), 영리한 기훈(최우식), 정보통 상수(박정민) 등 친구들과 폭력조직 소유 도박장을 습격해 거액을 훔칠 작전을 세운다. 대만의 어느 에메랄드빛 바다 한복판 섬으로 떠나 천국처럼 살리라는 단꿈도 잠시, 무자비한 인간 사냥꾼 ‘한’(박해수)이 이들을 쫓기 시작한다.

10대 소년의 죽음을 뒤쫓은 독립영화 데뷔작 ‘파수꾼’으로 주목 받은 윤 감독이 당시 주연 이제훈‧박정민과 9년 만에 재회하면서 각본까지 썼다. 앞서 그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신작을 고민하던 2016년 유행어였던) ‘헬조선’과 연결 지으며”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올 초 영화잡지 ‘씨네21’과 인터뷰에서다.

“가오 챙길 때냐 당장 먹고살 돈도 없는데.” “이러다 총 맞아 죽을까 봐 걱정이야. 마약에 총에 이게 말이 되냐.”

주인공들의 대사는 희망 없는 극 중 시대상을 암시한다. 스모그가 자욱한 잿빛 도시엔 부서지고 녹슨 건물들이 흉물처럼 빈민가를 이뤘다. 낮엔 시위대의 기약 없는 호소, 밤엔 총성이 울려 퍼진다. 갈 곳 없는 젊음들은 지하클럽에 엉겨 음악과 술에 취한다.

이런 시대묘사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기존 할리우드 영화들과 비교하면 다소 무난한 편이다. 한국이란 배경을 접목한 신기함은 있지만 대부분 장면은 무국적 공간인 듯한 인상을 준다.

134분 추격전 느리지만, 인물 돋보여

배우 최우식과 안재홍이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주연 이제훈, 박정민과 이번에 새로이 뭉쳐 색다른 변신을 보여준다. [사진 넷플릭스]

배우 최우식과 안재홍이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주연 이제훈, 박정민과 이번에 새로이 뭉쳐 색다른 변신을 보여준다. [사진 넷플릭스]

추격전은 다소 더디게 흐른다. 늘 어둠 속에 움직이는 한이 왜 이토록 잔혹하게 쫓는지 영화가 절반 이상 흐를 때까지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피땀이 범벅 된 준석 등은 실체를 알기 힘든 인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도망친다. 선악 구분이 뚜렷한 추격전에 익숙한 관객에겐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알 수 없는 긴장감만으로 지켜보기엔 134분이란 상영시간이 제법 길기도 하다.

오히려 인물의 내면에 초점 맞춰 볼 때 흡인력이 커진다. 가까운 관계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을 포착하는 건 ‘파수꾼’이 입증한 윤 감독의 장기다.

'사냥의 시간'에서 박정민과 이제훈의 캐릭터는 9년 전 '파수꾼' 속 10대들이 그대로 자랐다면 이랬을까 싶은 닮은 구석도 보인다. [사진 리틀빅픽쳐스]

'사냥의 시간'에서 박정민과 이제훈의 캐릭터는 9년 전 '파수꾼' 속 10대들이 그대로 자랐다면 이랬을까 싶은 닮은 구석도 보인다. [사진 리틀빅픽쳐스]

겉으론 강해보여도 실은 가장 여린 준석과 친구들 사이에서 겉도는 상수 등은 각각 이제훈, 박정민이 ‘파수꾼’에서 맡은 캐릭터와도 닮은꼴.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에 의해 피 흘리며 쓰러진 친구를 같은 길바닥에 누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 끝도 없는 고독을 껴안고 파멸로 뛰어드는 청년들의 모습은 감독이 바라본 ‘헬조선’의 풍경일 터다. 총에 맞아 쓰러져도 자꾸 깨어나는 ‘좀비파이터’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승패가 빤한 링 위엔 아예 오르길 포기하는 청춘도 있다.

베를린영화제선 "긴장감" vs "유머없다"

'사냥의 시간'에 그려진 근미래의 한국은 온통 잿빛 스모그와 누런 연기로 가득하다. [사진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에 그려진 근미래의 한국은 온통 잿빛 스모그와 누런 연기로 가득하다. [사진 넷플릭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는 파노라마 부문에 이 영화를 초청하며 “고전적인 스릴러 장르를 근미래에 성공적으로 접목하며 오늘날 한국사회 현실에 강력한 시각적 도달점을 제공한다”고 했다. 당시 외신 반응은 엇갈렸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쉬지 않고 긴장감을 주는 폭력의 경주”, 리틀화이트라이스는 “꾸밈없지만 대단히 재밌는 영화”라 호평했다.

반면 스크린인터내셔널은 “유머 없고 지속적으로 영감 주지 못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라며 “거의 다 남성으로 채워진 영화의 젊은 주연 배우들은 괜찮은 편이다. 비록 당황하고, 헐떡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때때로 턱을 끈덕지게 세우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모든 것이었지만”이라고 꼬집었다.

코로나19로 가입 급증한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에서 주인공들을 쫓는 냉혈한 '한'. 박해수가 연기했다. [사진 리틀빅픽쳐스]

'사냥의 시간'에서 주인공들을 쫓는 냉혈한 '한'. 박해수가 연기했다. [사진 리틀빅픽쳐스]

영화는 공개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초 2월 개봉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사태가 악화하자 지난달 23일 극장 개봉 없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동시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년 이상 이 영화의 해외 배급을 대행해온 기존 해외세일즈사 콘텐츠판다가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처스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와 이중계약에 이의를 제기하며 법정공방에 휘말렸다. 이달 8일 법원이 콘텐츠판다가 낸 ‘사냥의 시간’ 해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손을 들어주며 오리무중에 빠졌다가, 16일 양측이 합의에 이르면서 다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게 됐다.

‘킹덤’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콘텐트가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가운데 세계 최대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도 ‘사냥의 시간’을 주목하는 분위기다. 22일 넷플릭스 1분기(1~3월) 실적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속에 유료 회원이 1577만명 급증했다. 전 세계적인 자가격리로 안방극장에 관객이 몰리면서다. 현재까지 넷플릭스 전 세계 누적 유료 회원 수는 1억8286만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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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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