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공정’의 땅에 도전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지인들과의 총선 예측 내기에서 이겼다. 미래통합당 당선자 수 맞히기였다. 가장 작은 수를 써내 상금을 차지하고 공짜 밥도 먹었다. 차명진 후보 세월호 발언과 황교안 대표 ‘n번방 호기심’ 발언이 답안을 써내는 데 도움이 됐다. 주장한 내용의 진위를 떠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며 소리치는 차 후보의 태도에서 젊은이들이 조건반사적으로 ‘꼰대’ 직장 상사, 교사·교수, 부모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당이 선점한 공정·정의 영역에 #야당이 진지하게 나서기 꺼리면 #청년 유권자의 외면은 계속될 것

사전투표 날 투표소 앞 인증샷이 소셜미디어에 속속 올라왔다. 파란 옷을 입고 엄지를 세운 젊은이들이 잇따랐다. 핑크빛은 보기 어려웠다. 내기 승리를 직감했다(미래통합당의 ‘폭망’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다). 원래 파란 옷이 흔하기는 하지만 계획이 있어 입은 듯한 모습이 많았다. 청년층에서 청색 차림과 1, 5번 선택을 ‘개념 있는’ 행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즈음 한 모임에서 만난 3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친구 사이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민주당 지지가 압도적이다. 내로남불 때문에 민주당이 싫다고 하면 나를 생각 없는 사람 취급한다. 논쟁은 결국 정의와 공정이라는 가치에 어느 당이 더 부합하느냐로 이어지는데, 아무리 민주당이 이상해도 통합당보다는 낫다는 주장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덧붙였다. “지역구는 2번 찍지만 비례는 안철수당 찍을 것 같다.”

통합당은 선거 국면에서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말한 게 없다. 무능·오만·위선의 정권을 심판하자고 했다가 막판에는 여당의 개헌선(200석) 돌파는 막아 달라고 읍소했다. 공정·정의 측면에서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지켜 법치를 바로 세우자고 한 게 거의 전부다. 지난해 이맘때 권력의 주구(走狗)라고 비난했던 이를 정의의 사도로 칭송하니 진정성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유불리만 따지는 얄팍한 계산으로 보이기에 딱 좋다.

공정과 정의의 깃발이 꽂힌 곳은 내내 진보의 영토였다. 노무현 정권 탄생, 박근혜 정부 몰락 등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그 과정에서 경제 발전, 국가 안보를 새긴 깃발이 있는 보수의 땅은 쪼그라들었다. 보수 정치인이 새삼 공정과 정의의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농구 천재 허재가 축구 시합에 나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세대가, 유권자가 달라졌는데. 상대가 전쟁터의 중심에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승전기를 꽂았는데, 참호에 몸을 숨기고 우회로만 찾을 텐가.

보수 야당에도 희망의 빛은 있다. 진보 진영과 20대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1987년생, 1989년생 두 저자가 쓴 『공정하지 않다』는 책엔 2018년 서울교통공사의 계약직 정규직화 과정, 평창 겨울올림픽 때 남북 단일팀 구성으로 인한 일부 선수의 출전 기회 상실 등의 사례가 등장한다. 정규직과 올림픽에 들인 개인들의 노력이 무임승차자들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게 20대의 보편적 인식이라고 설명한다. ‘스펙’을 가린 블라인드 채용과 대입 학생부종합전형 확대에 반대하는 청년이 다수라고 한다. 저자들은 ‘지금 20대는 보수화됐다기보다 더 강력한 공정함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시·노동·국방·복지 등 전 영역에서 무엇이 진짜 공정한 것이냐는 물음이 가능하다.

2006년 영국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데이비드 캐머런은 8개 정책을 제시했다. 공공의료(NHS) 존중, 공교육 강화, 온실가스 감축이 포함돼 있었다. 9년째 집권 중인 노동당의 핵심 영역인 의료·교육·환경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줄곧 세금과 이민자 문제에만 매달려 온 보수당의 획기적 변신이었다. 캐머런은 “노동당이 말로만 하는 것을 우리는 실제로 한다”고 외쳤다. 정치평론가 팀 베일은 “중원(中原)을 노리는 전략”이라고 해설했다. 보수당은 4년 뒤인 2010년에 정권을 잡았고, 지금도 집권 중이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