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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풀린 나라 곳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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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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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부터 월 150만원의 국가배당금 지급.’ 국가혁명배당금당이 21대 총선에 내세운 대표 공약이다. 길거리현수막을 본 어린 학생들도 ‘월 150만원’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니 화제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재난지원금 주자 경쟁 #재원 대책 없으면 재정 파탄 우려 #보편증세 포함한 해결책 찾아야

이번 총선의 18세 이상 총 유권자는 4399만 명이다. 이들에게 매달 150만원, 1년에 1800만원을 지급하려면 791조원이 필요하다. 올해 정부 예산 512조원보다 많다. 이 당의 선거공보를 살펴보면 정부 예산을 60% 절약해 300조원을 마련하고 지역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등 재원 마련 방안도 있다. 물론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 득표율은 0.71%에 그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나섰다. 같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지만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다른 정책을 폈다. 서울은 ‘재난긴급생활비’라는 이름으로 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선별 지급을 하기로 했다. 반면 경기도는 ‘재난기본소득’으로 1인당 10만원씩 주는 보편 지급 방식을 택했다. 재난기본소득이라고 했지만 사실 금액이 너무 적고 일회성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소설가 공지영은 “제발 재난기본소득이란 말을 쓰지 말자. 긴급생활안정자금이 맞다. 기본소득은 그 어떤 나라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내엔 드문 보편 지급 방식 때문에 주목도는 높았다. 이 지사는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서소문 포럼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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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 차원에서 주는 재난지원금도 처음보다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 전 정부와 여당은 소득 하위 70% 가구에 최대 100만원을 주기로 정했다. 하지만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전 국민 지급으로 방향을 틀었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도 예산 삭감을 통해 1인당 50만원 지급을 주장했다. 이를 본 유승민 미래통합당 의원이 “대부분의 정당들이 국가혁명배당금당을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선거 후에도 논란이 계속됐다. 여당은 전 국민에게 지급하되, 고소득층이 이를 받지 않거나 기부를 하면 세액공제를 해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전 국민 지급을 위해선 3조~4조원의 적자국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원금 지급이라는 선례가 생긴 만큼 위기가 깊어지면 요구는 점차 거세질 것이다. 청년수당 등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지급 요구도 많아질 공산이 크다. 대체로 이런 공약은 재원 마련 대책이 허술한 경우가 많다. 애매모호한 ‘연금술’로 포장되기도 한다. 2022년 대선에선 이런 공약이 핵심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한국판 뉴딜로 일자리 50만개를 만들겠다며 추가 추경 준비를 지시했다. 예산 삭감에 한계가 있으니 필요한 돈은 국채로 조달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재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나라 곳간도 잘 관리해야 한다. 재정을 쓰면 경기 회복이라는 효과를 봐야 한다. 자칫하면 경기는 계속 침체하고 국채 이자를 갚기 위해 국채를 다시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상위 3~4번째에 속한다. 일본·중국보다 1~2단계 높다. 최근 20년간 떨어지지 않고 오르기만 했다. 나랏빚이 급격히 늘면 채무상환 능력이 떨어진다. 국가신용등급의 하락은 외환위기의 재발을 불러올 수 있다. 빚내는 것으론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증세다. 단골로 언급되는 게 부자증세다. 하지만 부자증세로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부유세를 도입했다 부작용 때문에 이를 폐지한 나라도 여럿이다. 지난해 말 고지된 종합부동산세는 3조원 수준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일회성 지원금 주기에도 벅차다. 어딘가 쓰려면 기본적으로 버는 것이 있어야 한다. 다만 야당도 다양하고 새로운 요구가 분출하는데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비판만 해선 향후 선거에서 이길 가망이 없다.

세금은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납부해야 한다. 부자증세만 아니라 보편증세도 생각해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연금술이나 특정 계층에 대한 징벌적 과세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새로 문을 여는 21대 국회에서 현실성 있고 공평한 대안을 찾는 정책 경쟁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김원배 사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