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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민순의 퍼스펙티브

동북아 안정 위해 한국이 미·중, 중·일 이음매 역할 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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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코로나 이후 동북아 질서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겨우내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새들이 봄바람에 쓸려가고 새순이 돋아났다. 바이러스 태풍이 할퀴고 간 고통의 자리에도 인류의 삶을 이어갈 새순이 자랄 것이다. 고통은 교훈이 따라야 거름이 된다. 범지구적 보건 체계는 물론 정치·안보·경제 등 모든 분야에 교훈을 남기길 바란다.

코로나 사태 초기 한·중·일 소통 부족, 대처에 차질 #팬데믹 등 재난 잦아지며 동북아 3국 협력체제 절실 #미·중 관계와 중·일 관계는 동북아 정세 구도의 핵심 #G2가 대결보다 협력하려면 한·일의 촉진 역할 중요

중국 당국이 올해 1월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공개하자 각국에서 출입국 통제가 시작됐다. 중국에 이어 한국·일본에도 확진자가 잇따랐다. 감염병 진원지를 중심으로 우선 지역 통제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런데도 세 나라 사이에는 정보 교류와 의사소통 차질로 신경전까지 벌어졌다. 위기에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감염병이 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지는 상태에서 한·중·일만의 지역 통제로 확산 자체를 방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역 통제가 제때 작동했다면 역병의 초기 확산을 지연시키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대응 모델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나라 사이 사람의 이동은 연간 3000만 명에 이른다. 3국 협력체계가 적시에 작동하지 못한 것은 돌이켜봐야 할 일이다.

‘성곽 도시’ 지향하는 트럼프 행정부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팬데믹(대 유행병) 발생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범지구적 체계와 병행해 지역 협력 체계도 정비해야 한다. 동북아에는 역병 외에도 인간에 의한 재앙에서부터 자연재해에 걸쳐 많은 재난이 도사리고 있다. 미세먼지와 황사, 방사능 오염수와 해양 플라스틱 등 환경 문제, 해난 사고 등 공동 행동이 필요한 일이 줄지어있다.

한·중·일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소통과 협력 증진을 위해 2011년 서울에 3국 협력 사무국(Trilateral Cooperation Secretariat·TCS)을 설립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마자 3국이 TCS의 기능을 즉각 활용해 공동 대응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정보와 물자를 제때 공유하고 출입국 통제 방식도 건설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코로나19 발생을 발표한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난 3월19일에야 3국 외교장관이 화상회의를 열었다. “바이러스 퇴치와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활용한다”는 원론적 논의를 했다. TCS는 3국 정부 관계자들이 합동 근무하는 곳이다.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3국 정부가 사무국에 지침을 보내 공동의 행동 계획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한·중·일 협력을 확대하고 사무국의 기능도 강화해야 한다.

한·중·일 협력은 한·미·일 협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세계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앞으로 세계 질서는 정치·군사·경제와 함께 사회·보건·환경을 중시하는 포괄적 안보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야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포괄적 안보는 미·중이 공존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코로나 이전부터 미·중은 협력보다는 대립의 길에 들어섰다. 2002년 사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4년 에볼라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미·중이 함께 손잡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두고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 미·중이 대결보다는 협력의 길로 가도록 한국과 일본이 촉진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동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태평양과 인도·태평양이라는 국제 정치 지형이 어긋나는 것을 넘어설 수 있다. 한·일은 미·중에 대해 그럴 위치에 있고 잠재 역량도 갖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와의 연결을 축소하면서 ‘성곽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중국이 국력 격차를 빠르게 좁혀오고 있다. 코로나의 중국 책임론이 거론되는 와중에 자국의 체제 우월성까지 내세운다.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균형이 시급하고 그만큼 한·일 역할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올해 11월 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더라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중국이 볼 때 한·일은 인접국 중 중국적 가치체계에 맞서는 대표적 세력이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 경로에 위치한 이들과의 타협 없이는 ‘중국의 꿈’에 다가서기 쉽지 않을 것이다. 주변 안정을 기하고 미국과의 갈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한·일과의 3국 협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친미·친중·친일·반일 같은 풍토병 퇴치해야

문제는 일본과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내 정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다.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데 인색하거나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해서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불안정한 미국의 우산에서 벗어나 ‘보통국가’가 되고자 한다. 국제사회에서 응분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2021년 도쿄올림픽도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축제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지리·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대접받을 자세를 갖추는 게 올바른 순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 셈법과 이념적 대결 도구로 삼고 싶은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 동북아 안정과 협력 구도는 크게 미·중 관계와 중·일 관계라는 두 축에 기초한다. 미·중 사이에는 한·일이, 그리고 중·일 사이에는 한국이 각각 이음매 역할을 해야 작동이 가능한 구도다. 미·중·일 사이에 한국이 가질 수 있는 특유한 위상이다.

국내 정치 대립이 심할수록 시민의 삶은 피폐해진다. 국제사회에서도 미·중 관계가 각박해질수록 많은 나라가 각자도생의 길에 들어선다. 코로나 이후 세계는 이미 진행 중인 기존 질서의 붕괴가 빨라지고 격변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것은 지정학적 환경이다. 코로나가 지나가면 북한 핵과 미사일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러 나올 것이다. 한·중·일과 한·미·일의 연동은 북핵을 통제하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로 가는 관문이다.

‘대유행병(pandemic)’이라도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친미·친중, 친일·반일 같은 고질적 정치 ‘풍토병(endemic)’이 서성거릴 것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위대한 발견의 길은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땅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와 총선 이후 한국이 얻어야 할 교훈은 정치 풍토병을 퇴치하고 지정학적 위상에 눈을 뜨는 것이다.

한·중·일 협력사무국 위상 더 높여야

한·중·일은 세계 인구의 21%, 세계 GDP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 협력 제도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3국은 1999년 마닐라 ASEAN+3(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3자 정상회담을 갖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3국을 순회하는 정상회담을 개최해 왔다. 세 나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해에는 개최하지 못했다.

정상회담 산하에 외교·재무·통상·환경·보건 등 장관급 협의체가 있고, 각급 실무협의도 운영 중이다. 정치·군사안보 같은 민감한 문제에 앞서 우선 보건·환경·재난구조·인적교류를 중심으로 협력을 증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화와 협력이 쌓여 가면 3국 간 중첩되는 방공식별구역(Air Defence Identification Zone·ADIZ) 설정이나 북핵 문제의 진전 시 북한 경제 개발 공동 프로젝트 같은 이슈들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한·중·일 협력사무국(TCS)은 각국의 대사급 인사가 2년씩 사무총장을 맡는다. 26명의 사무국 직원이 재난 대비 도상 훈련, 환경 보호 인식 제고, 질병 예방 관리 회의 등을 준비한다. 업무가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한·중·일 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이 타협하기 어려운 길목에서 한국이 균형점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TCS를 서울에 설치한 것은 동북아 역내 구도에서 한국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가 대를 이어가며 3국 협력의 틀을 주도했다. 다행히 한국은 코로나 방역의 모범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선 동북아의 다양한 협력을 지속해서 이끌면서 세계적 역할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