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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꼬마 김수환 추기경, 영화로 만든 이는 불교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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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영화에서 수환(이경훈)은 호기심 많고 다정한 아이다. ’천주님은 냉이꽃처럼 작고 이쁘시겠다“며 웃는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영화에서 수환(이경훈)은 호기심 많고 다정한 아이다. ’천주님은 냉이꽃처럼 작고 이쁘시겠다“며 웃는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아이는 가난한 옹기장수집 8남매 중 늦둥이 막내였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 대신 행상 다니던 어머니에게 세상에 궁금한 것들을 민들레 홀씨처럼 뿜어냈다. 하도 순해서 ‘순한’이라 불렸다. 가톨릭 사제가 되라는 어머니 청만큼은 “인삼 장수가 되고 싶다”며 거절했다. 고생만 한 어머니를 넉넉히 모시고 싶어서였다. 1969년 47세에 세계 최연소, 한국 최초 추기경에 오른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이야기다.

어린 김수환 ‘저 산 너머’ 30일 개봉 #카톨릭신자 지인이 건넨 책 한권이 #건축가 남상원 움직여 40억원 투자 #“종교엔 벽 없어” 부처님오신날 상영

‘거룩한 바보’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담은 영화 ‘저 산 너머’(감독 최종태)가 오는 30일 부처님 오신 날 개봉한다. 동화 『오세암』의 작가 고 정채봉이 1993년 김 추기경과 나눈 대화로 엮어낸 동명 연재물이 토대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투자자는 불교 신자다. 건축가 남상원(63) 아이디앤플래닝그룹 회장이 제작부터 배급까지 40억여 원을 투자했다.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은 우리가 잘 몰랐잖아요.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이 영화가 어렵게 사는 이들의 희망이 될 것 같았습니다.”

남상원 회장

남상원 회장

21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남 회장은 김 추기경을 “암울한 시기, 민주화에 앞장선 분”이라고 말했다. 30년 가까이 건축일을 해온 그가 영화를 제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1월 말 친한 사이인 가톨릭 신자 백장현 교수(한신대)가 갑자기 전화로 영화 투자를 제안했다. 그는 “영화는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했지만, 그날 저녁 감독·제작자와 함께 백 교수가 찾아왔다.

“책(원작)을 주면서 이걸로 영화를 만들어 김 추기경 11주기에 개봉하면 좋겠다더군요.”

다음날 별생각 없이 펴든 책은 책장을 넘길수록 가슴이 뛰었다. “이익을 떠나, 이 영화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영화는 1928년 경북 군위 한 시골의 7세 소년 수환(배우 이경훈)을 비춘다. 정겹고도 유쾌한 장면이다. 그러나 시대와 가난의 아픔은 어린 수환을 피해가지 않았다. 오래 병을 앓던 아버지(안내상)는 생전 직접 꼬아둔 짚 멍석에 싸인 채 지게꾼 등에 얹혀 무덤길로 향했다. 일제 소학교 아이들의 돌팔매는 수환의 이마에 흉터를 남겼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을 앉혀두고 “마음밭에 무엇이 심겨 있느냐”“천주님 자식을 맡아 기르는 게 부모”라 했다. 3살 터울 형 동한(정상현)이 먼저 사제가 되길 택했다. 수환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빈 옹기 속에서 자기 안의 씨앗을 고민한다.

260대 1 경쟁을 뚫고 발탁된 주연 이경훈 등 배우들의 차분한 연기가 두루 가슴에 스민다. 연출은 영화 ‘플라이 대디’(2006)로 데뷔해 ‘해로’(2012)로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받은 최종태 감독이 맡았다.

남 회장은 영화를 찍을수록 신기한 인연을 느꼈단다. 주 촬영 세트는 그의 고향 논산에 마련됐다. 김 추기경이 나고 자란 대구, 경북 군위 등에 마땅한 세트 부지를 못 찾던 감독과 제작자가 논산의 질박한 시골 풍광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다.

실제 광산김씨인 김 추기경 아버지의 고향도 논산이었다. 생전 김 추기경은 천주교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 흔적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남 회장은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이 부분도 밝혀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추기경 할아버지 김익현이 조선시대 논산 출신 정치가 사계 김장생 선생의 후손이었다”고 했다. 광산 김씨 증손을 찾아가 고문서와 족보를 샅샅이 살펴 알아낸 것이다.

자주 현장을 찾아가 아역 배우들에게 인심 후한 ‘할아버지’라 불렸다는 그다. 장기 두는 사람으로 카메오 출연도 했다. “쓸데없는 간섭하지 않고 힘들 때 같이 고민하고 격려하는 게 즐거웠다”고 한다. 딱 하나, 영화에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익현이 우리나라 최초 신부 김대건의 강론을 듣는 장면은 그가 제작진을 설득해 넣었다. 원래 책엔 없는 허구다.

남 회장은 “김익현이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데는 김대건 신부의 강론을 들었던 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가 논산 강경에서 미사를 보던 무렵 17세이던 김익현의 집안도 논산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유추했다”면서 “영화에 천주교 역사가 나오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은 김대건 신부의 동굴 미사 장면. 고창 선운사 말사 도솔암 동굴에서 찍었다. 남 회장은 원작 책에서 김 추기경의 구술을 정리한 한 자락을 떠올렸다. 로마 바티칸의 그 어떤 작품 앞에서도 5분 이상 머문 적이 없던 김 추기경이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앞에선 “처음 보는 데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정든 모습”이라 한 시간이나 머물렀다는 대목이다.

남 회장은 “저는 종교라는 것에, 큰 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편하면 좋은 것이다. 신은 하나니까”라며 빙그레 웃었다. “시골서 올라와서 출세한다는 게 어렵다. 힘들 때 절에 가면 마음이 안정돼 불자가 됐지만, 사실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을 다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신문 배달하며 고학했고 돈 벌려고 건설 일을 택했지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산 안창호를 읽던 문학 소년이었다는 그다.

이번 영화 개봉일에 대해선 “2월 선종 11주기 개봉은 무리여서 미루던 중에 코로나19 사태가 왔다. 위기가 기회다, 답답하고 힘든 시기에 우리 영화가 딱 맞다 싶었다”면서 “29일 개봉하려다가 부처님 오신 날 행사가 한 달 뒤로 미뤄지는 것을 보고 부처님까지도 우리한테 자리를 내주시는데, 이날이 좋겠다 싶어 30일로 정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이번 영화로 인연을 맺을 관객들이 “봄이 오면 산 구석구석에 들꽃이 피듯 세상 어느 곳에나 보이지 않아도 찾으면 늘 희망이 있다는 걸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나원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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