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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하승수의 단심, 비례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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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콘텐트제작에디터

서경호 콘텐트제작에디터

“뭐, 한 마디로 개판이죠.”

소선거구 고집한 통합당에 부메랑 #여권, 시민운동과 촛불만으론 한계 #구조·제도 바꿔 정책의 질 높여야

어느 저명한 정치학자의 총선 관전평이다. 너무 솔직담백한 표현에 평소 그의 점잖은 이미지를 생각해서 익명 처리한다. 특정 정당의 승패를 거론한 게 아니라 거대정당의 위성정당 꼼수로 코미디가 돼버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얘기다.

1년반 전에 “300명의 독재보다 360명의 민주주의가 낫다”(2018년 11월22일)는 제목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의원정수 확대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딛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던 뉴질랜드 시민단체의 구호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시민단체와 소수정당에선 19대 총선 직후인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고 정당 간의 어정쩡한 타협을 거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4년 가까이 연동형에 매달린 하승수 변호사가 큰 역할을 했다.

편의상 그를 변호사로 칭하지만 사실 변호사·회계사는 15년째 휴업 중이다. 제주대에서 4년간 교수생활도 하다 그만 뒀다. 그래도 지난해 그의 직함은 여럿이었다. 2011년 녹색당 창당에 참여해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연동형 비례대표 도입을 주장하는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와 예산낭비를 고발하는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직함도 있었다. 지난 3월엔 녹색당 위원장을 그만 두고 정치개혁연합 집행위원장으로 타이틀이 바뀌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연합비례정당을 추진했지만 민주당이 더불어시민당을 만들면서 ‘팽’ 당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총선 이후 그의 근황이 궁금해 전화했더니 의외로 ‘씩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서소문포럼 4/21

서소문포럼 4/21

총선 어땠나.
“선거제도 개혁의 성과를 지켜내지 못해 안타깝다. 소수 정당이 원내 입성을 못했고 정책 경쟁도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당과 협상하다가 깨졌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을 비판했던데.
“의사결정을 하는 민주당 내부구조가 엉망이었다. 연합정당을 수용하는 듯하다가 당 내부에서 이견이 나오자 손쉬운 위성정당의 유혹에 넘어갔다.”
총선 민심이 충격적이다.
“민주당이 잘해서 얻은 승리가 아니다.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했던 미래통합당이 부메랑을 맞았다. 이미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서울 등에서 득표율 차이보다 더 많은 당선자를 냈는데도 통합당은 선거제도를 고치지 않고 소선거구제를 고집했다.”

실제로 총선에서 민주당이 지역구 253석 중 163석(64.4%)을 석권했지만 지역구 투표에서 민주당의 득표율은 49.9%에 불과하다. 통합당(41.5%)과 8%포인트 차이일 뿐인데 지역구 의석은 거의 두 배다. 그만큼 사표(死票)가 된 보수 유권자의 표가 많았다는 얘기이고 통합당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지역구 득표율대로 의석을 나눴다면 지금처럼 거대정당이 독주하는 의회가 아니라 다양한 색깔의 정당이 경쟁하는 다당제 국회가 됐을 것이다.

비례대표 정당 명부의 길이가 48.1㎝로 역대 최장이어서 20년 만에 수개표를 했다. 정당 이름도 생소하고 기기묘묘한 공약을 내건 곳도 있었다. 정치를 너무 희화화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유권자의 판단은 냉정했다. 35개 비례정당 중 ‘묘한’ 정당을 포함해 30개 정당은 ‘봉쇄조항’이라고 불리는 득표율 3%를 넘지 못해 의석을 얻지 못했다. 비례투표 용지의 맨 윗칸을 차지해 혹시나 ‘부수적 이득’이 있을지 궁금했던 민생당도 2.7%에 그쳤다. 하 변호사의 얘기를 더 들어봤다.

다당제가 왜 필요한가.
“양당제는 상대방이 잘못해도 이길 수 있다. 스스로 잘할 필요가 없으니 평소 정책을 개발하고 인재를 양성할 유인이 없다. 정쟁 중심의 비합리적 의회가 아니라 경쟁과 토론으로 정책의 질을 높이고 문제해결 능력을 높여야 한다.”
이번에 얻는 교훈이 있다면.
“선거제도 개혁, 참 쉽지 않더라. 그래도 안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바뀌었지만 입법부는 해방 이후 한 번도 교체된 적이 없다. 시민운동이나 촛불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만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 구조와 제도를 바꿔야 한다.”

하 변호사의 요즘 직함은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하나로 단출해졌다. 녹색당에선 평당원으로 남았다. “20대 국회에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5건 해서 다 이겼다. 특수활동비를 5분의 1수준으로 줄이긴 했는데 들여다보니 업무추진비로 돌린 게 많더라. 정책보고서와 자료집의 표절 여부도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우리 국회는 더 투명해져야 한다.”

서경호 콘텐트제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