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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직원의 보이스피싱 눈썰미···차 몰고 할머니 뒤를 쫓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일 오전 11시 세종시의 한 농협지점에 A씨(80·여)가 들어와 돈을 인출했다. 수시로 인출하는 통장이 아니라 만기가 정해진 예금을 중도에 해지하고 1000만원이나 찾았다. 인출한 돈은 모두 오만원권으로 200장이나 됐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오른쪽 둘째)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오른쪽 둘째)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A씨가 농협을 자주 찾는 고객인 것을 알고 있던 직원 성미정(26·여) 주임은 이를 수상하게 여겼다. 평소에 백만원 넘게 출금하는 경우가 거의 없던 A씨가 거액을 인출하는 게 믿지지 않아서였다. 그는 A씨에게 “어머니 어디에 쓰시려고 돈을 이렇게 많이 찾으세요, 전화를 받고돈을 찾으시는 거애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A씨는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현금을 찾은 A씨는 농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세종경찰서, 서세종농협 성미정 주임 등 표창 #보이스피싱 속아 2000만원 인출한 고객 도와 #차 몰고 고객 집으로 가 절도 직전 범인 검거

뭔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한 성 주임은 동료 직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A씨의 집으로 따라가겠다고 보고했다. 이미 A씨는 다른 지점에서 현금 2000만원을 찾는 기록도 확인됐다. 지점장과 동료들은 “그러는 게 좋겠다”며 선뜻 허락했다. 성 주임은 그 길로 자신의 차를 몰고 A씨가 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A씨의 집은 농협에서 15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 주임이 도착하자 한 낯선 남자가 우체통에서 돈다발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A씨가 찾았던 돈뭉치와 같았다. 성 주임을 목격한 남성은 집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뛰어갔지만 오르지는 못했다. 성 주임이 그를 가로막고 붙잡았기 때문이다. 성 주임은 “그때는 막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말레이시아 출신 B씨(20)로 보이스피싱 사기단 총책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A씨 집에서 돈을 훔쳐 달아나던 중이었다. 성 주임을 따라 현장에 도착한 농협직원 C씨도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B씨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잠시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B씨를 인계한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A씨는 성 주임에게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이날 오전 보이스피싱 사기단으로부터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으니 돈을 인출해 우체통에 보관하라”는 전화를 받고 농협으로 가서 돈을 인출했다고 한다. 집에 다른 가족도 었지만 사기단에 속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사 결과 이날 붙잡힌 말레이시아인 B씨는 지난 2월 15일 국내로 입국했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현지 브로커의 말을 듣고 들어와 보이스피싱 사기단 총책의 지시를 받고 전국을 돌며 현금을 찾아오는 역할을 맡았다.

B씨는 경기도와 강원도·전남 등 전국 11개 지역에서 2억4000만원가량을 찾아 총책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C씨에게 범행을 지시한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뒤를 쫓고 있다. 그동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유학생이나 불법체류 외국인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경우는 많았지만 B씨처럼 범죄를 위해 입국한 건 드문 사례로 알려졌다.

직접 범인을 검거한 성미정 주임은 “그때는 무작정 할머니의 뒤를 쫓아가 범행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당시에는 겁도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세종경찰서는 지난 17일 보이스피싱 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성미정 주임 등 직원 2명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연합뉴스

경찰은 서세종농협 봉암지점 직원인 성 주임과 C씨에게 경찰서장 표창장과 포상금을 수여했다. 봉암지점에서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세종경찰서 이강범 수사과장은 “경찰과 정부기관에서는 절대로 금품을 요구하거나 보관할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며 “돈을 인출해 보관하라는 전화는 100% 보이스피싱 범죄로 즉시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말했다.

세종=신진호 기자 shin.jinho@jon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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