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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북새통 기획재정부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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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몰골이 영 말이 아니다. 코로나19가 사납게 물어뜯은 경제의 모습이 그렇다. 나오는 숫자마다 ‘유례없는’이란 수식어가 달릴 지경이다. 주당 36시간 이상 일하는 ‘풀 타임’ 일자리는 지난달에만 무려 159만2000개가 날아갔다. 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정기예금·적금·보험을 깨고 있다. ‘김포공항 국제선 이용객 0’ ‘1분기 LNG 선박 수주 0’ 등 전대미문의 ‘0의 행진’도 이어지고 있다.

금융위기보다 더한 시련 왔는데 #국민과 활발히 소통 않는 기재부 #얼어붙은 경제 심리 누가 보듬나

뭐, 우리만 그런 건 아니다. 미국에서는 4주 새 2200만 명이 실업자가 됐고, 중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은 사상 최저인 -6.8%를 기록했다. 남미 등지의 몇몇 개발도상국은 재정위기·외환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 공장들이 멈춰 서는 바람에 주 수입원인 광물자원을 제값에 팔지 못했다. 나랏빚도 못 갚을 판이어서 투자자가 빠져나갔고, 화폐가치는 추풍낙엽 신세가 됐다. 그렇다고 남의 불행이 우리 위안거리가 될 수는 없다. 세계 경제가 드러누우면 한국은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완전히 오리무중이다. 회복한 환자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면 좋겠건만, 아무래도 한동안은 어려울 듯하다. 전 세계 누적 감염자·확진자 그래프는 독 오른 뱀 마냥 고개를 꼿꼿이 쳐든 채 치솟아 오르고 있다. 지난 1주일간 감염자는 50만 명, 사망자는 4만6000명이 늘었다. 각국의 셧다운(사업장 폐쇄) 조치도 당분간 계속될 태세다. 앤드루 쿠오모 미국 뉴욕 주지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단계적 경제 활동 정상화 방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셧다운을 5월 15일까지로 보름 연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며칠 전 “거의 모든 국가의 경제적 혼란이 올 2분기에 집중되고 있다”고 했다.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이 -3%일 것이라는 전망을 발표하면서다. 사실 IMF는 이 말에 희망 사항을 은근슬쩍 집어넣었다. 하반기에는 코로나19가 사라진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것저것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진짜로 금융위기보다 더한 놈이 온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제방역 대책본부’가 돼야 할 기획재정부가 의외로 여유로워 보인다. 1주일에 한 번 대통령이 주재하는 비상경제회의 관련 말고는, 별다른 브리핑이나 백 브리핑(배경 설명)이 없다고 한다.

2008년 말~2009년 초 금융위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기억하기에 당시 기재부는 매일매일 브리핑과 백브리핑이었다. 강만수 장관, 김동수·배국환 차관을 비롯해 신제윤 국제업무관리관(전 금융위원장), 육동한 경제정책국장(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최종구 국제금융국장(전 금융위원장) 등이 릴레이 하듯 나섰다. 브리핑 ‘거리’를 마련하려 공무원들은 허구한 날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레퍼토리가 부족했는지 어느 고위공무원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뒷얘기까지 늘어놨다. “강 장관이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 장관을 붙들고 계속 뭐라고 얘기하더라. 가서 들어보니 ‘위 니드 스와~아프, 위 니드 스와~아프(We need swap·통화 스와프가 필요하다)’였다. 말릴까 말까 고민했다.” 뒷얘기 약 1주일 뒤 한국과 미국은 300억 달러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입술이 부르튼 강만수 장관은 꼭 브리핑이 아니더라도 무시로 기자실에 들러 흉중을 털어놨다. 농익은 대책뿐 아니라 설익은 생각을 꺼내 들고서 ‘이런 것들을 검토하겠다’ ‘협의하겠다’ 고 하는 일도 잦았다. 때론 ‘알맹이 없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래도 강 장관은 브리핑과 백브리핑, 간담회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고선 꽁꽁 언 경제 심리를 녹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 덕일까. 한국은 비교적 빨리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튼튼한 경제 기초체력을 갖추게 됐다.

지금 금융위기보다 더한 놈이 왔다고 해서 기재부가 더 난리를 쳐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기대 밖이다. 매일 국민과 소통하는 질병관리본부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질본은 이를 통해 ‘정은경 효과’를 얻었다. ‘정은경 본부장이 말하면 국민이 믿고 따르는’ 현상 말이다. 국민 인식도 대조적이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 가운데 ‘코로나19 대처를 잘했다’는 54%인 반면, ‘경제 정책을 잘했다’는 단 1%였다(한국갤럽 13~14일 조사).

이래서야 ‘경제’ 이전에 ‘경제 심리’를 살릴 수 있을까. 겁이 난다. 두렵다. 물리적으로 경제 활동이 제한된 판에, 국민 스스로 경제 심리마저 자가 격리하면 어쩌나. 경제에도 정은경 효과가 절실하다. 12년 전 금융위기 때 북새통이던 기재부가 문득 그립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