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산막엔 봄, 마음은 어느새 귀거래사 읊는 두보

중앙일보

입력 2020.04.19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53)

겨우내 쌓인 눈 녹인 물로, 어젯밤부터 내린 적지 않은 봄비로 산막 계곡의 물소리가 깊고 웅장하다. 비 오는 산막을 뒤로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봄의 단서는 곳곳에 넘쳤는데 냉이며 쑥이며 지금 보기는 좋다만 잔디밭엔 잡초다. 적절한 시기에 관리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쳤다. 도 닦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뽑을 수밖에.

그렇게 뽑다 보면 풀을 뽑는지 마음을 뽑는지 모를 지점이 온다. 무념무상이 따로 없다. 내가 풀을 뽑는 것인지 풀이 나를 뽑는 것인지 모를 그런 지경을 겪어보아야 진정 풀을 뽑았다 할 것이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다. 그렇게 마음의 잡초를 뽑는 것이니 그 힘 하나로 또 세파를 헤쳐나가는 것일 거다.

산막엔 봄이 가득하다. 메마른 대지는 갈증을 풀고 수목은 신록을 틔우며 계곡의 물소리는 장엄하다. 일 년 중 가장 예쁜 색을 자연이 내보내는 시기다. 나는 어느덧 귀거래사 읊으며 고향길을 향했던 두보의 마음이 된다. 마음이 형(形=육체)의 역(役=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전원에 마음을 돌리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있다고 주장하는 두보의 마음이 된다.

참 많이도 말했다. 무항산(無恒産) 유항심(有恒心). 전문경영인이 어떤 회사의 경영을 맡는다는 것은 조선 시대의 선비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과 닮았다. 임금에게 내침을 당하거나 임금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칭병하거나 부모님 시봉 등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내고 낙향했으며 벼슬을 구걸하지 않았다. 낙향하여 그들이 한 일은 서생들 모아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거나 강태공처럼 빈 낚싯대 드리고 세월을 낚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정이라도 일어나거나 스스로 맘을 바꿔 왕이 찾으면 살펴 나갈만하면 다시 벼슬길을 나가곤 했다. 그러나 나갈만하지 않으면 죽어도 나가지 않았다.

이런 나가고 듦의 원칙은 첫째도 명분, 둘째도 명분이었으며 결코 가벼이 부귀와 명예를 좇지 아니하였다.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말아도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다’라는 대장부 정신에 투철하였다. 무항산(無恒産) 유항심(有恒心)의 선비정신이요, 진정한 군자만이 가능한 길이라 했던 바로 그 길이다. 제대로 된 선비, 제대로 된 경영인의 길은 이처럼 멀고도 험하다. 오늘날 이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나? 나 또한 다르지 않다. 산막의 아침, 창가에 핀 외로운 꽃 하나가 고고하다. 감자 한 톨로 한나절을 버티며 군자고궁(君子固窮) 무항산(無恒産) 유항심(有恒心)의 길을 살펴본다.

봄맞이 대청소를 한다. 독서당, 평상, 원두막, 아래 데크 의자 책상, 닭장, 창틀, 야외 부엌, 에어컨, 실외기까지 겨우내 묵은 먼지와 때를 고압 세척기로 말끔히 밀어냈다. 깔끔해진 모습을 보니 힐링이 되는구나. 내 마음의 때도 함께 벗겨지는 기분이다. 다음은 창고 정리다. 없는 게 없는 창고. 일단 먼저 모든 짐을 꺼내어 본다. 그동안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며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분류한다. 버리기만 잘해도 절반은 성공이라는 각오로 임한다. 꺼내어 좋은 공구는 잘 작동하는지, 녹이 많이 슬진 않았는지, 사용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본다. 어느새 창고에 숨어있던 각종 짐은 마당을 채우고 날은 저문다. 이렇게 창고 정리를 마쳤다. 사부작사부작 소일삼아 하니 큰 힘 안 들이고 깨끗해졌다. 이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안다. 아, 버리는 것이 제일 어렵구나. 내일은 반대편 창고다.

산막 대청소 3일 차다. 아래층 창고, 보일러실, 야외 부엌, 원두막, 독서당, 곡우 초당 뒤 창고 및 보일러실, 돌계단을 실외용 진공청소기로 불고 닦는다. 청소기 기능 중에 블로어 기능이 있어 편리하다. 빨아서 안 되는 것은 불어서 날리는 것이니 기능이 오묘하다. 하긴 흡입과 배기는 양날의 검이니 모터 하나로 해결이 될 법도 하다. 데크 책상에 앉아 깨끗해진 주변을 돌아보니 마음이 한가롭다. 다만 전기선과 물 호스를 끌고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아 도와줄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예전 산막 공사할 때 보조를 데리고 다니던 일꾼의 마음을 이해한다. 무어든 자신이 해봐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산막은 학교다. 인생학교(School of Life)가 멀리 있지 않다. 오후엔 오랜 산막지기가 아드님과 함께 돼지국밥을 사 들고 온다니 아주 수월하겠다.

산막은 대청소 중. [사진 권대욱]

산막은 대청소 중. [사진 권대욱]

이곳 산막에서 기백이 누리와 함께하는 시간은 천금같이 귀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늘 내게 고마운 곳. 하루 열아홉시간의 깨어있음도, 흔들림 없는 신념도, 모두 이곳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 소중함이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하나둘씩 생기게 되고 세월이 길다 보니 이들이 모여 하나의 공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30년 전 중동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밤낮으로 고생하던 시절, 그때 내 마음에 국가와 민족이 있었던 것이 아니듯. 그러나 세월이 지나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애국애족의 길이었듯. 그렇게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일 거다. 처음부터 여기에 무얼 만들어야지 만들어서 뭘 해야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면 결코 이런 자연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자연이라 하고 그래서 그것이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리 귀도 이제 제법 서 가는구나. 진돗개가 맞긴 한 모양이다.

하루를 마무리 짓는 나의 위치는 언제나 같다. 의자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접고 창고를 닫고 바비큐 기계를 제자리에 놓고 커버를 씌우고 전선 코드를 뽑고 스피커 커버를 씌우고 원두막 테이블을 접고 수도꼭지를 잠근다. 그러고 나면 나는 눕는 의자 하나, 앉는 의자 하나, 데크에 내고 지는 해를 바라본다. 바람과 공기를 느끼며 풀벌레 소릴 듣는다.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손도 돌아가고 고추 따는 사람도 모두 가버린 지금 이 순간의 적막을 즐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고, 나는 또 일상의 물결에 몸을 맡길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듯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곡우가 밥 먹으라 부르면 나는 휘적휘적 곡우가 준비한 저녁을 먹고 또다시 밤바람을 맞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며 온몸을 온 마음을 불사를 무엇을 찾는다.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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