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게걸스레 먹던 사상범의 ‘빵’, 그 미학적 승화가 김춘수 ‘꽃’

중앙선데이

입력 2020.04.1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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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꽃의 시인 

전혁림, 김춘수 시판화집 중 ‘꽃’, 석판화, 41x30cm, 2005년. [맥향화랑]

전혁림, 김춘수 시판화집 중 ‘꽃’, 석판화, 41x30cm, 2005년. [맥향화랑]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는 경남 통영 출신이다.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에 진학해 서울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도쿄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을 다녔다. 해방이 되자 6년제 통영중 교사가 됐다. 1945년 늦가을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돼 유치환을 좌장으로 해 음악 윤이상, 정윤주, 미술 전혁림, 연극 서성탄, 김용기, 박재성, 문학 김상옥, 김춘수 등이 모였다. 이들은 연극, 미술전람회, 민속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니혼대 유학 중 알바하다 감옥행
빵 독식한 지식인의 민낯에 충격

평판과 실재 사이의 괴리에 주목
본질 추구하는 주지 시인으로 성장

통영·마산 등서 화가·문인과 교유
꾸득꾸득 말린 대구에 복국 즐겨

마산고 국어교사 때 제자 중엔 천상병도

1949년 처가가 있는 마산으로 가 교편을 잡았고 아이들도 키웠다. 통영도 마산도 다 항구다. 김춘수는 삶의 전반부 대부분을 짭조름한 갯내음을 맡으며 살았다. 겨울의 마산엔 대구가 흔했다. 살림살이가 되는 집에는 김장을 하듯 대구를 사다 장만했다. 알은 소금에 절이고, 내장은 국을 끓이고 살은 마당의 빨랫줄이 축 늘어지도록 걸어 말렸다. 꾸득꾸득 말랐다 싶은 대구 살점을 베어내 초장에 찍어 소주를 마신다. 도시가 어둠에 잠기고 무학산을 향해 바다가 해풍을 밀어내는 밤이면 빨랫줄에 걸린 대구의 인광이 푸른 불빛을 뿜어내며 바람을 따라 마당과 골목을 날아다녔다. 소주를 마시는 사내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다른 사연들의 불빛들이 피어났다. 밤새 지나치게 강렬한 불빛을 피운 사내들은 아침 일찍 어시장으로 나가 복국을 마셨다.

항구에서 완만한 등고선을 타고 펼쳐지는 비산비야(非山非野)가 끝나는 꼭대기 지점들을 산복도로가 이어 준다. 산복도로에는 마산중고, 마산여중고, 성지여중고, 제일여중고, 경남대학 등 학교들이 줄지어 있다. 아침이면 남녀학생들의 등교행렬이 부산한 길이다.

김춘수, 뉴욕 맨해튼 힐튼호텔, 1983년. [사진 임영균]

김춘수, 뉴욕 맨해튼 힐튼호텔, 1983년. [사진 임영균]

김춘수는 1949년부터 3년간 마산고 국어교사로 지내며 산복도로의 일원이 되었다. 시인 김상옥, 김남조, 이원섭 등이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 나중에 시인이 된 천상병은 학생이었다. 이후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대학강사 생활을 했다. 1960년에 마산의 해인대학(현재의 경남대)에 잠시 근무했다가, 다음 해 대구로 가서 경북대와 영남대 교수가 됐다. 그러나 그의 집과 가족은 70년대 초반까지 마산에 있었다. 그만큼 마산과의 인연이 꽤 길었다.

김춘수는 자식들에게 과묵했다. 어쩌다 이야기를 꺼낸 꽃의 시인 김춘수의 화두는 꽃이 아닌 빵이었다. 그 빵은 그가 니혼대학 재학 중 겪은 수감생활 속에 만난 빵이다.

부잣집 도련님 김춘수는 호기심으로 친구들을 따라 가와사키 부두 노동자로 화물선 석탄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노동이 불순한 반국가행위로 오해받아 요코하마의 헌병대와 경찰서에서 반년 이상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다른 감방을 쓰던 일본의 거물급 사상범과 취조실에서 맞닥뜨리게 됐다. 물자가 극단적으로 궁핍하던 전시상황, 도쿄제대 경제학과 교수이자 인민전선파 일원인 그가 사식으로 들어온 따끈한 빵 서너 개를, 굶주린 식민지 청년의 간절한 눈길을 피한 채 뒤돌아 앉아 추접스레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존경받는 지식인의 사회적 평판과 허명 그리고 그 적나라한 실재 사이에 놓인 엄청난 모순과 괴리의 발견이 그를 사물의 이면에 놓인 본질을 추구하는 주지적인 시인으로 이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자지간이 어색한 그였지만 그때의 충격을 그와 예술적 유전자를 공유한  조각가 아들인 용삼(1952년생)에게 몇 번이고 들려주었다. 빵과 그의 시 꽃은 서로 무연하지가 않다. 빵 사건의 충격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용되어 언어와 대상과의 관계라는 미학적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의 대표시인 ‘꽃’이 그렇다.

마지막 행(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중 ‘하나의 의미’는 나중에 개작되어 ‘하나의 눈짓’으로 바뀐다. 개념(의미)이 구체(눈짓)로 바뀐 것. 절대 공백의 균질공간에 자리한 개념으로서의 꽃(flower)이 장소로 내려와 구체적으로 현전하는 꽃(a flower)이 되었다가 필경 서로 잊히지 않는 반복성의 꽃(the flower)이 다짐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다. 이는 장소와 공간, 개념과 형상을 한 화면 속에 교차시키는 현대미술의 기법을 방불케 한다.

그렇다. 김춘수는 미술이론가로도 일류였다. 전쟁이 끝난 마산에는 문인과 화가들의 합동시화전이 자주 열렸다. 김춘수·강신석 시화전(백랑다방, 1953년), 김상옥·전혁림 시화전(비원다방, 사랑다방, 1954년), 김수돈·박생광 시화전(비원다방, 1954년), 이원섭·전혁림 시화전(비원다방 1954년) 등이 열렸다.

이 무렵 통영의 전혁림은 교직을 얻어 마산으로 주소를 옮겼는데 마땅한 거처가 없어 김춘수의 집에서 기거했다. 김춘수는 그림을 좋아했다. 마산에서 두 사람의 미술에 관한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김춘수는 포비즘, 큐비즘,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론의 전개에 거침이 없었다.

대구에 정착하자 그의 미술계 나들이가 잦아졌다. 김태수가 운영하는 경상감영 근처의 맥향화랑은 그가 애호하는 산책코스였다. 1978년 맥향화랑에서 마산시절부터의 맹우 파스텔 화가 강신석과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전시 수익금 300만원은 큰돈이었다. 그걸 온전히 강신석에게 다 줬다. 강신석의 꿈인 뉴욕 정착이 이루어졌다.

정현종 등과 유기봉 포도밭서 시낭송회

통영에서 활동했던 화가 전혁림(가운데 모자 쓴 사람)의 회고전에 참석해 축시를 낭독하는 김춘수(오른쪽), 2002년, 덕수궁미술관. 맨 왼쪽은 오광수 관장. [사진 임영균]

통영에서 활동했던 화가 전혁림(가운데 모자 쓴 사람)의 회고전에 참석해 축시를 낭독하는 김춘수(오른쪽), 2002년, 덕수궁미술관. 맨 왼쪽은 오광수 관장. [사진 임영균]

김춘수의 시어는 공간이 됐다가 장소가 됐다가, 인식이 됐다가 지각이 됐다가 하기에 현대미술의 소재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다. 맥향화랑은 판화집 제작을 많이 했는데, 김춘수의 팔순기념으로 이명미, 백미혜, 최용대 등 3인이 1인당 3점씩 제작해 시판화전을 열었다. 김춘수의 사후 2년, 김춘수·전혁림 시판화전 ‘통영이 낳은 두 예술가의 만남’이 맥향화랑에서 열렸다. 20점의 판화가 제작됐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말년의 김춘수에게는 새로운 식우(食友)들이 등장했다. 주로 신사동의 진동횟집을 찾았다. 의사이자 시인인 김춘추가 식대를 자임했고, 시인 조영서, 서정춘, 노향림, 심은주 등과 김춘수와 시화집을 낸 바 있는 화가 최용대가 가세했다. 김춘수가 특히 즐겼던 건 진동횟집의 생선미역국이었다. 마산, 통영 사람들은 소고기 대신 가자미나 광어 등의 서덜을 넣어 미역국으로 끓인다. 어릴 때부터 입맛에 맞던 미역국을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음이 즐거웠다. 술자리의 김춘수는 말수가 적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김춘수의 식우로 막내아들뻘인 유기봉 시인이 있다. 그는 주말마다 승용차로 김춘수를 태워 맛집을 찾아다녔다. 김춘수는 생선회뿐 아니라, 맑은 지리, 매운탕, 설렁탕, 곰탕 등 탕을 좋아했다. 남양주 진접에 있는 유기봉의 포도밭에서는 매년 시낭송회와 시화전이 열렸다. 포도나무들은 시인들의 이름으로 명명됐다. 김춘수를 비롯해 시인 정현종·조정권·이수익·정호승·이문재·이승하·이덕규·김행숙·박상순·구두현·문태준·심은주 등과 화가 최용대 등이 참석했다. 음식을 차리고 음악을 더해 축제를 가졌다.

김춘수의 이지적인 면을 견디다 못해 차갑다는 느낌을 갖는 문우들이 많았다. 알고 보면 그는 자신을 서먹하게 대하던 조각가 아들의 작품을 남들에게 칭찬할 줄 아는 따뜻한 부정을 지닌 아버지였다. 어려운 친구에게 무조건의 도움을 주는 인정스런 사내였다. 가슴을 열면 멸치 떼가 밀려오는 봄날의 통영 바다처럼 넉넉하고, 비릿하면서 따뜻한 마음이 나타났던 사람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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