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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조건강도·IT 만남의 산물…아동 보호환경 강화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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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호 09면

사회병리학으로 본 성범죄

지난 7일 n번방 사건 관련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본사 앞에서 게시물 삭제 시스템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일 n번방 사건 관련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본사 앞에서 게시물 삭제 시스템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n번방 사건’이 전국민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사이버 성범죄는 사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해 버닝썬과 정준영 단톡방, 2018년 양진호 웹하드 카르텔도 비슷한 부류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동영상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하다 2018년 적발된 한국인 손정우는 1년 6개월 복역을 마치고 27일 출소 예정이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아동 음란물 사용자 제재 근거 필요 #현행법상 본 사람은 공범 적용 어려워 #피해자 탓 많이 하는 것도 문제 #성착취물에 노출 방치 부모 처벌해야

이런 사건은 왜 자꾸 일어나는 걸까.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신간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민음사)에서 ‘걸캅스’ ‘팔려가는 소녀들’ 등 영화를 텍스트 삼아 성착취 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구조에 대해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제기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문화예술분야 1위에 오른 방송을 토대로 출간된 책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사이버 성범죄 수법이 거의 같은 속도로 발전하며 법률 재정비를 따돌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n번방 관련자 모두에게 엄벌을 요구하는 국민청원 5건에 560만여 명이 동의했을 만큼 사회적 관심이 높아 희망이 있다. 14일 만난 이수정 교수는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이 놀랍다”면서도 “이제 겨우 불이 붙은 만큼 총선 이후에도 꺼트리지 않고 기조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죄심리학자인데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한국의 형사사법제도는 피고인 위주로 서비스가 제공된다. 피고인의 인권침해 없는 수사절차와 정당한 양형, 피고인의 인권침해 없는 교화를 논할 뿐, 피해자는 범죄 입증 구성요건 충족을 위한 진술만 따면 잊혀진 존재가 된다. 2012년 해바라기센터 초창기에 전문가로 참여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범죄가 정말로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됐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알리는 게 마음의 숙제가 됐다. 그런 차원에서 n번방 사건에 대해서도 ‘음란물이 아니라 강압과 협박에 의한 성착취물’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많은 사람이 동감하는 것이 경이로운 변화라 생각한다.”
피해자들의 잘못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책의 첫 번째 섹션이 피해자들에 대한 이해도를 가져야된다는 얘기다. 사건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 탓을 한다. 가정 폭력 끝에 남편을 살해하면 재판부가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왜 이혼 안했느냐’인데, 이혼할 수 있는 가정 같으면 살인을 했겠나. ‘가스등’ 같은 영화를 보고 피해자들에게 왜 이런 병리가 생기는지 이해하면 그런 몰지각한 질문은 안할꺼다. 잘못한 애들도 있지만, 이런 문제에 다같이 각성하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다. 사회가 안 바뀌면 조주빈의 헤비유저 1만 5000명은 계속 플랫폼을 전전할꺼다.”
최근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을 출간한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박종근 기자

최근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을 출간한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박종근 기자

이수정 교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불분명한 ‘사이버 성착취’ 지대에 아동청소년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원인은 열악한 보호환경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방치해도 부모를 엄벌하지 않는 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1990년대 중산층이 몰락할 때부터 가출 문제가 상습비행으로 이어질 거라고 예견됐다. 가정이 해체되고 보호환경이 열악하면 아이들은 피신 차원에서 가출을 한다. 2000년대 가출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했던 조건만남이 테크놀로지와 만난 게 바로 랜덤채팅 앱인데, 그걸 깔기만 하면 어린 애들을 아무 제재없이 유인할 수 있다. 그런 환경에 처한 여자애들이 혼자서는 위험을 느끼니 여럿이 모여 ‘가출패밀리’가 조직되고, 남자애들도 포주나 보디가드처럼 끼어들다가 영상물을 찍어 ‘조건강도’가 된다. 조주빈의 행위도 조건강도와 테크놀로지의 만남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10대를 보낸 아이들이 커서 조주빈이 된 거다.”

가출청소년 같은 취약층만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닌데.
“요즘은 SNS로 예쁜 애들을 검색해서 ‘모델 알바 해볼래?’하고 접근해 개인정보를 털어간다. 그러니 보통 애들까지 자기집 안방 화장실에서 성착취물을 찍어 보내는 시대가 됐다. 그게 ‘n번방 사건’이고, 과거에 가출청소년들이 조건만남할 때는 쓰레기 같은 애들의 그렇고 그런 일들로 취급했던 것이 지금은 당장 우리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문제의식을 갖게 된 거다. 그런 식의 랜덤채팅 앱만 300개가 넘고 n번방 같은 플랫폼이 500개가 넘는다는데, 이런 소규모업자들이 IT 영상업체로 등록하면 정보통신부에서 보호받고 중소기업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웹하드 업자 양진호도 국가지원금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 입법해서 단속해야한다. 21대 국회에서는 여러 가지 법률안이 개정되고, 입법 과정을 거치게 될거다.”

랜덤채팅 앱이나 성착취 플랫폼이 제재를 받지 않는 이유는 IT산업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를 피해자의 인권보다 우선하는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기술발전과 윤리 사이 간극의 문제에 대해 “윤리적 발전을 하면 된다”고 일갈했다. “작년에 랜덤채팅 앱 문제를 진단하려고 함정수사하듯이 채팅을 해 봤다. 채팅을 하다가 텔레그램이나 라인으로 옮겨 1:1로 집중 유인하는 구조더라. 그래서 내가 라인을 방문해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걸 아느냐고 물으니 난리가 났다. 이런 식으로 악용될 줄 몰랐던 건데, 이후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부적절한 문제를 모니터링하고 경고조치를 집행한다더라. 그런 대안들이 없지 않은데, 자발적으로 스크리닝 엔진을 운영하도록 유도하고, 경고했는데도 지속한다면 플랫폼을 처벌하도록 입법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범죄가 많아지니 모르는 사람은 좀처럼 믿을 수 없게 됐다.
“보이스피싱을 피하는 방법도 돈 보내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라는 건데, 그런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야 된다. 모델 일을 제안받고 ‘네’ 하는 순간 모델 일에 대한 ‘네’가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네’가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야 된다. 그런 제안을 받았을 때 그 사람 아이디를 검색해보면 나한테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그 정도 주의하는 노력에 대해 일단 알리는 게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이 쓰는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피해가 양산될 수 있다는 걸 부모가 알아야 자식을 보호할 것 아닌가.”
미국에선 ‘웰컴투비디오’에서 영상을 다운받기만 해도 징역 5년 8개월을 받았다. n번방 가입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사이버 성범죄의 향방이 달라질텐데.
“현행법상 단순가입자들은 공범으로 보기도, 신상공개도 쉽지 않다. 범죄단체 조직죄를 적용하겠다고 하는데, 범죄단체 입증이 가능할지 두고봐야 된다. 그래서 관람자가 아니라 아동 음란물 사용자로 법률을 개정하자는 거다. 상습사용자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면 되는데,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는 걸 일상오락으로 생각하는 기성세대들은 문제 의식이 없다. 국회 청원 1호 법사위 토론에서 조차 ‘청소년기 음란물 한번 안보고 자란 애들 어딨냐’고 하더라. 디지털 세상을 모르는 정치인들이 이런 공간에 대해 상상도 못하는 건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세대교체가 되야 한다.”

미 하원, 온라인 성매매 광고 땐 사이트도 처벌하는 법 통과

넷플릭스 다큐 ‘팔려가는 소녀들’(2017)의 문제제기 이후, 2018년 2월 미국 하원은 온라인사이트에서 성매매를 조장하는 광고나 콘텐트가 게재될 경우 사이트도 민형사 처벌을 한다는 내용의 온라인 성매매 퇴치법을 통과시켰다. 상원을 통과해 입법이 되면 구글을 이용하는 랜덤채팅 앱 등 한국의 성범죄 플랫폼도 영향받게 된다.

이수정 교수는 n번방 재발 방지를 위해 플랫폼에 대해 입법으로 단속하되, 형법상 의제강간연령을 높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OECD 국가 중 의제강간 최저기준을 13세로 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뿐으로, 영국·미국 다수 주·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네덜란드·룩셈부르크·포르투갈·핀란드 등처럼 16세로 상향하자는 것이다. “의제강간연령이란 이 정도 연령까지 절대 손대지 말자는 약속이다. 의제강간연령을 높이면 아이들을 유인하는 모든 예비적 행위를 불법행위로 단속할 수 있고, 아이들은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기본법 개정이 어려운 만큼 더욱 필요하다. 수많은 특별법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 보다 기본법을 바꾸면 사회적 경각심을 주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반면 소년법 개정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14세에서 13세로 형사책임 연령 하향’이 아니라 보호환경 결핍을 채워주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소년은 엄벌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란 것이다.

“소년 범죄자가 사회화 과정 없이 20대 중반에 출소하면 또다시 범죄자가 되기 쉽다. 소년보호 처분을 전문화해야 한다. 현행 소년법은 10호 처분밖에 없지만 20개 정도 만들 수 있다. 소년원 형태를 연령대별로 다양화할 수도 있고, 위탁가정이나 사회에 나오기 전에 거치는 중간 처우시설을 만들 수도 있다. 부모 책임도 강화해야 한다. 소년 범죄와 아동학대사건을 같이 진행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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