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당신은 BTS?”이글거리는 눈으로 다가온 포르투의 여인

중앙일보

입력 2020.04.17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0)

사랑에 빠져 버렸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 깊은 곳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그 순간 양 볼이 따스해지더니 발그레 복숭아색이 되었다. 바람 계단을 걸어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포르투와 사랑에 빠졌다.

바다와 강이 이어진 모래톱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순례자. 해안길의 흔한 모습이다. [사진 박재희]

바다와 강이 이어진 모래톱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순례자. 해안길의 흔한 모습이다. [사진 박재희]

다시 돌아와 한달살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찍어둔 포르투바닷가 동네의 작은 집들.

다시 돌아와 한달살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찍어둔 포르투바닷가 동네의 작은 집들.

아주 오래전에 외운 시의 구절이 그렇게 절실한 문장일 줄이야. ‘만날 때 헤어질 때를 염려하는 것처럼’ 도착한 순간부터 떠나야 할 날이 걱정이었다. 켜켜이 쌓인 문화와 깊은 역사의 더께 위로 일상이 흘러다니는 도시에서 현지인처럼 골목을 휘적휘적 걸으며, 이른바 유명 관광지 도장깨기라는 것을 하면서도 난 그 시구를 수십 번 되뇌었다. ‘우리는 만날 때 헤어질 때를 염려하는 것처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포르투를 떠나 다시 길을 나서야 했던 날,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를 생각했다. 포르투갈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열아홉 번째 날이다.

포르투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는 해안길과 센트럴루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정통성에 무게를 두는 사람은 내륙으로 걷는 센트럴을 택하지만, 해산물이 풍부해 먹을거리가 많고 보드워크로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는 해안길이 인기다. 인생도 순례도 양 갈래 길에서 쉽게 마음을 정하기란 쉽지 않다. 선택은 취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포기하고 버리는 것을 정하는 결정이니까. 가지 않은 길이 될 루트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일단 바다를 보고 싶어!”

포르투를 떠나는 길이 아쉬워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된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성경속 롯의 아내를 떠올렸다.

포르투를 떠나는 길이 아쉬워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된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성경속 롯의 아내를 떠올렸다.

바닷마을 사람들의 산책모습. 고요하고 평화롭다.

바닷마을 사람들의 산책모습.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안길로 향했다. 날개를 쭉 펼친 하늘이 대서양과 닿아 끝이 없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고르기 힘들 만큼 아름답다. 순례자 친구들이 그렇게 해안길 해안길하며 외치던 이유였다. 산소 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나는 바람이 불었고, 해변인가 하면 수산물 시장이 나타나 지루할 틈 없이 바다와 함께 걷는다. 나흘간 포르투에서 푹 쉬며 에너지를 충전한 데다 풍광에 취해 피곤한 줄도 몰랐던 것 같다. 황홀하게 걷다 보니 오늘의 목적지에 닿아있다. 매일 힘들고 지쳐 한계에 달했을 때 겨우 걷기를 마무리했는데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아름다움에 취해 너무 쉽게, 누워서 떡 먹듯 그런 날 말이다. 바닷길 25㎞를 걷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어른의 몸통 크기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수산물 거래소가순례길에 있다. 응원의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포르투갈 사람들.

어른의 몸통 크기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수산물 거래소가순례길에 있다. 응원의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포르투갈 사람들.

학교를 개조한 알베르게는 넓고 조리시설도 훌륭하지만, 평소 매식을 하는 나는 식당을 추천받아 다시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 노을과 함께 연분홍빛 바다를 마주한 식당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 기준으로 저녁 식사 시간으로는 이른 시간이었는데 몇 명이 식전 파이를 먹고 있었다. 무리에 있던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무안할 정도로 시선을 고정하고 나를 바라보던 그 여인이 다가왔다. 내 앞에 서더니 ‘난 너한테 반했어’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럴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황스러움을 넘어 아주 조금은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불꽃을 담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당신을 아니 나는 당신이…”
“……”
“당신은 비티에스입니까 아니, 당신은 한국입니까?”

그렇다. 여인은 BTS를 몹시 사랑한다. 인생이 어둡고 죽고 싶도록 힘들었는데 BTS를 만난 후에 다시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열혈 팬이었다. 여인은 딸과 함께 BTS의 팬클럽 아미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면서 한국말 교실을 조직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BTS를 이유로 내게 돌진한 여인, 한국에 반했고, 한국 음악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팬심은 듣기 좋은 것이었지만 나는 배가 고팠고 K-POP 대화보다는 따스한 수프를 먹고 싶었다.

“우리 동네를 보여주고 싶어. 제발,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더 머물면 안 되니?”

타리아이와 페이지, 조안. 매일 우연히 만나며 인연이 깊었던 순례자 친구들인데 포르투 이후 흩어졌다.

타리아이와 페이지, 조안. 매일 우연히 만나며 인연이 깊었던 순례자 친구들인데 포르투 이후 흩어졌다.

여행 중에는 이런 호의 혹은 접근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받아들여 더 없는 추억을 쌓을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안전을 위해, 여행을 위해 거절이 필요한 때도 있다. 게다가 난 그냥 여행이 아니라 순례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음 마을에서 순례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난 눈꼬리를 내리고 정말 슬픈 표정을 지은 후 하얀 거짓말을 했다. 한국이라는 모든 것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 여인을 실망하게 하지 않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마리냐까지 38.5㎞를 걷는다.

라브루주 마을. 노을에물든 바다는 연분홍빛이다.

라브루주 마을. 노을에물든 바다는 연분홍빛이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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