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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높이 50m 붉은 벽돌탑, 천 년의 시간을 담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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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벽돌 건축의 재발견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오 보타:영혼을 위한 건축’이 올 초 개봉했다. 빛과 영성의 건축가로 유명한 마리오 보타(77)의 구도 정신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회·유대교 회당·이슬람 사원 등 세계 곳곳에 종교 건축을 다수 남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인간의 영적인 것에 부응하는 건물을 짓고 싶다.”

낡은 듯 새로운 벽돌 인기 높아져 #화성 성모성당은 지역명소 부상 #도시재생·복고 트렌드와 어울려 #극장·공장·아파트 등 다양한 시도

이 영화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물은 그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짓고 있는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이다. 성당 설계를 의뢰한 이상각(62) 신부도 나온다. 이 신부 또한 지난 30년 시간을 이 건물에 바쳐왔다. 영화 후반부, 보타의 한마디가 귀에 박힌다. “건축가의 진정한 고객은 특정 인물이 아니다. 한 명의 고객 뒤에 있는 공동체, 지역사회다.” 세속의 가치를 초월하는 동시에 이 시대를 함께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을 예찬한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성모성지 대성당 풍경. 50m 높이의 두 탑이 장관을 이룬다. [사진 남양성모성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성모성지 대성당 풍경. 50m 높이의 두 탑이 장관을 이룬다. [사진 남양성모성지]

남양성지는 조선시대 병인박해(1866) 당시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달 초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성당 전면에 우뚝 솟은 붉은 탑 두 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높이 50m 벽돌 탑이다. 탑뿐만이 아니다.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4913㎡(1488평) 크기의 성당 외부 전체를 붉은 벽돌로 마감했다. 총 70만장이 들어갔다. 웅장하면서도 성스러운, 갓 들어섰으면서도 오래된 듯한 분위기다. 벽돌을 즐겨 쓰는 보타의 개성을 즉각 알아챌 수 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 야심작  

남양 성모성당을 설계한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남양 성모성당을 설계한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

이상각 신부는 “현재 외부 공사는 마무리했고 내부 제단·성화 등을 진행 중이다. 완공까진 2~3년이 더 걸릴 것 같다. 보타와 ‘천천히 하자’ ‘서두르지 말자’고 했다. 500년, 1000년 후에도 남을 건물을 짓겠다”고 했다. 이 신부는 가톨릭 신자만이 아닌 일반 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키워가겠다고 약속했다.

“화성은 작곡가 홍난파, 가수 조용필의 고향이지만 문화 불모지에 가까워요. 지역 명소로 자리잡을 것으로 믿습니다. 사실 지금도 많은 이가 찾아오고 있어요. 보타는 무엇보다 지역성을 강조합니다. 벽돌도 이탈리아 제품을 생각했다가 국산으로 바꿨습니다. 전통사찰 기와처럼 성당 벽돌도 곱고 예쁘게 늙어갔으면 합니다.”

한국 측 파트너 건축가인 한만원씨가 거들었다. “벽돌 성당은 주변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마치 이곳에서 솟아난 느낌마저 줘요.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상상할 수 없듯이 남양성당 탑은 화성시의 구심점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벽돌 건축물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도시의 콘크리트 숲에 시간의 깊이를 입히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노출 콘크리트, 금속·유리 패널 등이 인기를 끌면서 벽돌 건축 또한 시들해졌으나 최근 친환경, 복고 트렌드를 타고 다시 힘을 받는 모양새다. 이를테면 벽돌의 귀환이다.

한국 사회에서 벽돌은 70~90년대 다세대·다가구 주택에 많이 사용됐다. 빨리 짓고, 빨리 팔아야 하는 경제적 이유도 작용했다. 하지만 도시 성장이 임계점에 이르고, 문화로서의 건축이 부각되면서 ‘싸구려 벽돌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요즘에는 종교 건축은 물론 박물관·아파트·공장 사옥·극장·골프장·전원주택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건축가 장영철씨가 설계한 서울 성수동 메가박스 극장. [사진 사진작가 노경]

건축가 장영철씨가 설계한 서울 성수동 메가박스 극장. [사진 사진작가 노경]

와이즈건축 장영철 소장이 지난해 말 서울숲 맞은편에 선보인 메가박스 성수점을 보자. 멀티플렉스 극장이라는 대중문화 핫 플레이스를 황갈색 벽돌로 감싸 안았다. 장 소장은 “옛 공장지대인 성수동이란 시간성·공간성을 고려했다. 벽돌건물 공장이 많은 뉴욕 브루클린의 도시재생도 참고했다”고 했다. 그는 신당동 서울 성곽 아래의 성곽돌집, 경기도 성남시 판교 주택, 서울 성산동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등 다양한 벽돌 건축을 시도해왔다.

건축가 장영철씨가 설계한 서울 신당동 성곽 벽돌집.[사진 사진작가 노경]

건축가 장영철씨가 설계한 서울 신당동 성곽 벽돌집.[사진 사진작가 노경]

서울시가 성수동 일대 붉은 벽돌 건축물 명소화 사업에 나선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다. 70~80년대 잇따라 들어선 벽돌 공장·창고·주택의 리모델링을 지원한다. 2018년부터 올해 말까지 10억원을 책정했다. 도심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차츰 종적을 감추는 옛 공장·주택의 경관적 가치에 눈을 돌렸다.

장영철 소장은 벽돌 건축 르네상스를 두 가지 관점에서 풀어냈다. 우선 저성장시대를 맞아 대규모 개발이 어려워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값져 보이는 벽돌 건축이 되돌아왔다고 설명했다. 또 실제 건축 현장에서 콘크리트 골조 바깥에 단열재를 쓰는 외단열이 권장되면서 열효율이 높은 벽돌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친환경 실내장식 재료로도 사용돼

건축가 최시영(리빙엑시스 대표)씨가 5년 전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에 선보인 전력설비업체 선도전기 사옥은 지역 명물이 됐다. 회색빛 일색의 공단에 빨간 벽돌 5층 사옥을 지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2017년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 하나인 레드닷 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본상을 받기도 했다.

최 대표는 “공장이 바닷가 인근에 있어 해풍에 쉽게 부식되지 않는 벽돌로 건물 전체를 덮었다”며 “벽돌은 건물 외장재를 넘어 최근 실내 인테리어용으로도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에는 벽돌을 타일처럼 얇게 잘라 건물 내벽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레트로·빈티지 스타일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밝혔다.

사실 벽돌은 가장 친숙한 건축 재료 중 하나다.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인류 문명과 함께해왔다.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콘크리트의 경제성에 밀리게 됐다. 한국에서는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 대학로 샘터 사옥, 장충동 경동교회 등을 남긴 김수근이 ‘벽돌의 건축가’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70~80년대 이후 맥이 약해진 벽돌 건축이 옛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벽돌로 외장한 서울 은평뉴타운 아파트. [사진 공간세라믹]

벽돌로 외장한 서울 은평뉴타운 아파트. [사진 공간세라믹]

조백일 공간세라믹 대표는 “2010년 이후 은평 뉴타운, 수원 광교, 서울 역삼동 등의 아파트·오피스텔에서 벽돌 건축을 잇달아 시도해 호응을 얻었다”며 “벽돌이 고급화되고 색상도 다양해지면서 벽돌 건축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환경을 강조하는 시대 흐름으로 볼 때 벽돌만큼 매력적인 소재도 드물다는 것이다.

최시영 대표의 평가도 비슷했다. “벽돌 하면 흔히 붉은색만 생각하는데 요즘 건축가들은 회색톤을 즐겨 쓴다. 벽돌은 질리지 않는다. 낡은 듯 모던하다. 가로·세로 쌓는 방식에 따라 디자인도 무궁무진해 결코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벽돌과 함께 40년…상금 1억원 건축상 첫선

조백일

조백일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 정신을 기대합니다. 건축이 사회의 이미지를 결정하잖아요. 보다 개성 넘치는 벽돌 건축물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총상금 1억원이 걸린 건축상이 새로 생겼다. 벽돌제조업체 공간세라믹이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공모하는 ‘공간세라믹 건축상’이다. 우리 건축계에서 보기 드문 상금 규모인 데다 정부나 지자체, 건축단체가 아닌 개별 기업이 제정한 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백일(66·사진) 대표에게 물었다. “상을 만든다고 벽돌 건축이 활기를 띨 수 있을까요.” 그는 “벽돌은 건축의 뿌리산업입니다.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있어요. 상금도 3억원으로 키워갈 계획입니다. 우리도 후세에 자랑할 만한, 희망컨대 문화유산 수준의 건축물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업체들의 활발한 동참도 바랍니다”라고 답했다.

조 대표는 40년 가까이 벽돌과 함께해왔다. 1983년 벽돌 유통업에 뛰어들었고, 97년 직접 공장을 차린 이후 각종 친환경·다기능 제품을 개발해왔다. 2006년 모범 중소기업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최근 국산 품질이 높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외국 고급제품의 85% 정도에 머물고 있어요.”

응모작은 회사 홈페이지(ggceramic.com)에서 접수한다. 응모 기간 내에 준공된 건축물이 대상이다. 대상 1점, 최우수상 2점, 우수상 10점을 선정한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