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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듣고 과감히 고른다" 최장수 클래식 MC 정만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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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서 클래식 프로그램을 20년 진행한 정만섭씨.

라디오에서 클래식 프로그램을 20년 진행한 정만섭씨.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을 감각으로 고르는 거죠. 협주곡을 들었으니 이번에는 실내악이나 독주곡이 좋지 않을까.”
KBS 클래식FM(93.1MHz) '명연주 명음반' 진행자인 정만섭씨가 자신의 집 한 벽 가득 빼곡한 음반 중에서 한장을 골라냈다. 안토니오 야니그로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다. “맨 처음에는 관현악을 듣는 게 좋을 것 같고. 뒤쪽에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넣는 게 좋겠어요. 빌헬름 캠프의 공인된 슈베르트가 좋겠네요. 소박하고 순음악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명연주 명음반'은 그가 2002년부터 진행해온 프로그램으로 정씨는 주말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한 프로를 가장 오래 진행한 클래식 DJ다. 2000~2002년 진행한 ‘FM실황음악’까지 포함하면 총 20년간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토ㆍ일 프로그램 중엔 재즈 평론가 황덕호의 ‘재즈 수첩’이 지난해 20주년을 맞았다.

‘명연주 명음반’은 요일별로 다른 장르의 ‘집중 감상곡’을 틀고, 앞뒤로 5~6곡을 배치하는 두시간짜리 프로다. 오후 2시 본방송, 오전 3시 재방송 된다. 국내 유일한 클래식 음악 채널에서 최장수 진행자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클래식FM의 유경숙 부장은 “지난 3년간의 청취율 자료를 보면 늘 KBS 클래식FM 프로그램 중 톱3에 들었고 무엇보다 평일보다 주말 청취율이 높다”고 소개했다. 평일에 못 들어도 주말에 찾아 듣는 팬층이 두텁다는 뜻이다.

정씨가 팬들의 신뢰를 쌓게 된 비결은 뭘까. 항상 집에서 방송을 준비한다는 그가 선곡하는 과정을 공개했다. 집 거실은 CD와 LP가 차지했다. “전부 몇장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한 번 정리해보려다 포기했죠.” 한쪽 구석에 낮은 테이블과 컴퓨터가 있다. 정씨는 여기에서 음악을 듣고 골라 컴퓨터로 선곡표를 만든다. ‘명연주 명음반’은 대본과 작가가 따로 없다.

좋다고 과감히 말한다

방송 두 시간 동안 말은 길지 않다. 하지만 요지는 정확하다. “리히터의 슈베르트 소나타 21번은 길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르헤리치의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반짝반짝합니다.”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요점을 짚는다.

그는 “이 음악을 왜 골랐는지. 왜 좋은지를 설명하려 한다”고 했다. “좋은 것의 기준은 어차피 내 주관이라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전 직관을 믿어요. 직관적으로 뽑고 최대한 객관화된 설명을 하는 거죠.”

정씨가 진행자로 데뷔하기 전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은 대부분 ‘지식형’이었다. 작곡가와 작품을 설명하고 해설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은 그렇게 음악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연주가 있으니 좋아하는 음악, 좋아할 만한 음악을 들어야죠”라고 했다. 이런 생각으로 ‘이 연주를 좋아한다. 이유는’이라는 식의 선곡과 멘트로 방송을 이어왔다.

죽도록 듣는다

“여기가 죽도록 듣는 곳이에요.” 그는 거실 한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 몇 시간이고 선곡을 위해 음악을 듣는다. 도착하는 신보는 모두 개봉해 듣는다. “그중에 한 10%만 살아남는다”고 했다.

옛 음반의 기억은 머릿속에 거의 들어있다. 정씨가 ‘죽도록’ 들어온 것은 1970년대부터다. “76년 중학교 1학년에 처음으로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2번 오케스트라 버전 LP를 샀다. 유진 오만디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녹음이었다.” 음반사 오아시스에 다녔던 외삼촌, 팝 음악에 빠졌던 이모들과 함께 살면서 온갖 종류의 음악을 들었다 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2년부터 학교에서 클래식 DJ를 맡았다.

이 오래된 청취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했다. 한 곡에서도 악장마다 좋은 연주가 따로 떠오른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은 마르케비치, 5번 4악장은 몽퇴, 6번은 스베틀라노프가 좋죠. 슈만 피아노 4중주는 바릴리 4중주단 멤버와 외르크 데무스, 베토벤 현악4중주 전집은 알반베르크 콰르텟이고요.”

20년 진행의 내공은 비상상황에서 나온다. “생방송 중에 갑자기 10분, 14분 애매하게 시간이 빌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맞는 곡을 한 1분 안에 찾아내야 되는데 못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인터뷰 중에도 짧은 시간에 대안을 찾아낸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의 리스트 교향시 전집 중 ‘오르페우스’가 12분 정도고, 멘델스존 무언가 음반 중엔 다니엘 바렌보임이 연주한 ‘뱃노래’가 3분 정도다. 20분이 비었다면 제프리 테이트가 지휘한 모차르트 교향곡 30번이 적당하다. 그는 “오래 했고 좋아하니까 다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직도 뒤진다

40여년을 들었던 사람답다. 최근에도 가장 좋아하는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시인의 사랑’ 초판본을 구하기 위해 독일의 노인과 e메일을 주고받고, 용산의 한 상가 옆 쓰레기통을 뒤져 모리스 장드롱의 바흐 첼로 모음곡을 찾아냈다. 이베이, 일본·독일의 각종 사이트에 매일 같이 들어가서 희귀음반, 옛 음반을 구하고 있다. “방송에서 트는 것도 거의 제 개인 음반이에요. 시중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는 선곡이 안 돼요.”

왜 음악과 음반에 빠졌을까. 정씨는 “사실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게을러서 가만히 듣는 음악을 하게 됐다”고 했다.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간다. 한때는 이순신 장군에 빠져 7년 동안 자료를 찾고 전국 각지에서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다. 음악에서도 끝까지 가보는 연주를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살아있어야죠. 정적이거나 모호한 연주는 별로예요.”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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