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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영화궁전의 시대, 멀티플렉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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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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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 스타들의 손도장이 모여있는 차이니즈 씨어터는 할리우드의 유명 관광지이자 실제 운영 중인 영화관이다. 맞은편 이집션 씨어터와 함께 1920년대 극장업자 시드 그라우맨이 만든 곳이니, 역사가 약 100년이다.

10년 전쯤 이곳에서 표를 사서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최신 극장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체험이었다. 좀 뜬금없이 보였던 중국풍의 장식 역시 화장실까지 그렇게 꾸며놓은 확실한 컨셉트 덕에 재미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화려한 공연장 같은 대형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새로웠다. 과거 서울에도 종로의 단성사나 충무로의 대한극장 등 대형 단관극장들이 명성을 떨친 시대가 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거나 내부가 바뀐 터.

실은 미국도 고대 이집트풍이든 아르데코풍이든 장식이 화려한 극장들이 ‘영화궁전’이라고 불리며 유행한 것은 과거의 일이다. 1950년대 미국 가정에 TV가 보급되고 극장 관객이 줄어들면서 대개의 영화궁전이 헐리거나 용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차이니즈 씨어터, 이집션 씨어터는 그런 세월을 버텨낸 역사적 유산인 셈이다.

한산한 영화관. 4월 관객은 사진의 3월보다 더 줄었다. [연합뉴스]

한산한 영화관. 4월 관객은 사진의 3월보다 더 줄었다. [연합뉴스]

요즘 영화관의 표준이 된 멀티플렉스는 궁전 같은 장식 대신 한 곳에 여러 스크린을 갖춰 상영의 효율성, 관람의 편의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한국에선 20여년 전부터 곳곳에 멀티플렉스가 보급된 것과 나란히 스크린 수, 관객 수가 가파르게 늘었다. 멀티플렉스의 성장이 영화산업의 성장에 한 축을 차지해온 것이다.

지금 극장가는 전례 없는 위기다. 4월 들어 전국 관객은 1만8000명 정도(지난주 평일 기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성탄절 같은 날은 하루 200만 명이 넘기도 했으니, 극성수기 대비 1% 미만으로 시장이 쪼그라든 셈이다. 관객이 없으니 새로운 상업영화는 개봉을 미루고, 새 영화가 별로 없으니 관객이 뜸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부산행’에서 이어지는 좀비영화 ‘반도’, 안중근 의사를 다룬 ‘영웅’ 같은 굵직한 한국영화가 여름 개봉을 기약하고 있지만 과연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른다.

이러다 봄 개봉을 미룬 영화들은 미아가 되는 건 아닌지, 단관극장처럼 멀티플렉스도 추억이 되는 건 아닌지, 비관적 전망에 끝이 없다 보니 오히려 관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도 있다는 지극히 낙관적 전망에 귀가 솔깃해진다.

“이 위기가 지나면 집단적인 인간적 참여의 필요, 함께 살고 사랑하고 울고 웃어야 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 강력해질 겁니다. 억눌린 욕구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전망의 결합은 지역 경제를 향상하고 국가 경제에 수십억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 등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극장 지원을 호소하며 지난달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