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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의식불명 아내의 은행예금이 ‘그림의 떡’ 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67)

김수한(81) 씨는 20년 전 중견기업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일하다 정년을 맞이했다. 퇴직 후에도 가지고 있던 기술을 활용해 계약직으로 경제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일할 곳이 있고, 나름대로 역할이 있어 하루하루가 즐겁다. 자녀 셋은 결혼해 잘살고 있고, 김 씨 부부는 서울 근교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그리고 김 씨의 월급이면 부부가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고, 약간의 저축도 하고 있다.

건강하던 김 씨 부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새벽에 급하게 119 구급대를 불러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2주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의식을 찾지는 못하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중간에 병원비를 정산하는데, 1주일간 발생한 총치료비가 1000만원인데 김 씨가 부담하는 금액은 70만원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고 간호인를 고용했는데, 하루 비용이 10만원에 주휴수당까지 지불해야 한다. 또 대학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으니 이제는 일반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옮기라고 한다. 김 씨는 부인이 의식은 없지만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하려고 한다. 비용이 부담되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년 전에 은행에 예치했던 2000만원의 정기예금이 곧 만기되기 때문에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치료비는 준비되어 있다.

부부가 아프거나 갑자기 상을 당했을 때 장례비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자금. 하지만 은행에서는 예금주가 김씨 부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은행 규정상 인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부부가 아프거나 갑자기 상을 당했을 때 장례비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자금. 하지만 은행에서는 예금주가 김씨 부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은행 규정상 인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정기예금 만기일에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 창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기예금 지급이 불가하다는 대답이었다. 김 씨가 “1년 전에 아내와 함께 은행에 와서 이 돈은 우리 부부가 아프거나 갑자기 상을 당했을 때 장례비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자금이라고 이야기했고, 은행에서는 급하면 만기 전에라도 해약해서 찾아 쓸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안내받았다”고 말하니 은행에서는 정기예금 예금주가 김 씨 부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은행 규정상 예금주 본인인 김 씨의 부인만이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김 씨가 “예금주인 부인이 지금 의식불명 상태인데 어떻게 은행에 올 수 있느냐고” 하면서 “부인이 입원한 병원에 거래하는 은행의 지점이 있으니 병원에 있는 지점 직원이 중환자실에 가보면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에서는 규정상 그렇게는 처리할 수 없고, ‘성년후견인’ 위임을 받아오라고 한다.

‘성년후견인’ 위임 절차를 알아보니 법원에서 판사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준비해야 하는 서류도 많고, 기간도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은행 직원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이번에는 큰 인심 쓰듯 은행에서 직접 병원으로 병원비를 지불하는 방법이 있는데, 문제는 3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씨가 “병원비보다 많이 드는 게 간병비인데, 이에 대한 지급이 가능하냐. 그리고 병원비가 회당 100만원 안팎인데 3회만 인출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간병비는 지급이 불가능하고, 규정이 3회에 국한되기 때문에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인출 불가능하다는 대답이다.

김 씨 입장에서는 은행이라 믿고 돈을 맡겼는데 막상 필요해서 돈을 인출하려 하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돈을 지급하지 않는 은행이 괘씸하다. 자녀들에게 병원비 부담은 주지 않으려고 주택담보대출을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은행과 거래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싫다.

위 사례자의 경우는 80대 전후 어르신에게서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이다. 은행의 입장에서는 업무처리에 대한 규정이 있고 은행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원칙을 지켜야 하므로 이러한 답답한 상황이 발생한다. 금융감독원에 문의하니 금융감독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은행의 자체 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 또 주변에서는 예금주인 80대 노모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예금주 본인이 와야 예금 인출이 가능하다고 해서 구급차를 타고 아픈 환자가 직접 은행을 방문한 경우도 있다. 일부 친절한 금융회사에서는 금융회사 직원이 직접 병원을 방문해 업무를 처리한 경우도 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금융당국은 약자인 노인을 배려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사진 Pixabay]

원칙도 중요하지만, 금융당국은 약자인 노인을 배려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사진 Pixabay]

하지만 은행이 아닌 81세 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믿었던 은행에 예치한 돈을 부인이 쓰러져 병원비로 사용하려고 인출하려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줄 수 없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원칙도 중요하지만, 금융당국에서는 위 사례자의 경우와 같아 약자인 노인을 배려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위 사례자는 중장년 반퇴자의 부모 세대일 가능성이 크다. 중대한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노인이 은행 등 금융회사와 거래할 때에는 정기예금보다는 CMA 계좌나 MMF 계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인으로 거래할 경우 본인만 예치금을 인출할 수 있기 때문에 인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밀번호는 금융거래에서 몇 회만 잘못 입력하면 예금자 본인이 금융회사를 방문해야 하므로 배우자나 자녀들이 알 수 있도록 따로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장이나 카드에 비밀번호를 적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분실했을 때는 위험스러우니 이것에 대해 대비는 해야 한다.

필자가 비밀번호를 따로 메모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글을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나 금융기관에서 사회적 약자인 노인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조심하면서 각자가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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