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8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합격했다. 한국인으로 12년 만에 OECD 사무국 정직원이 됐다. OECD에서 8년. G20, G7 등 선진국이 모여 글로벌 정책을 만드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배우는 건 많았다. 하지만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결핍이 있었다. 결국 모두가 선망하는 국제기구를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국제기구 10년 근무한 정지은 대표 #총선 후보 SNS까지 한눈에 '총선.kr' #5월엔, 한국 코로나 정책 종합 사이트
지난해 9월 정책 스타트업 '코딧(Codit)'을 창업한 정지은(36) 대표 이야기다. 유네스코와 OECD 등 국제기구에서만 10년 있었던 그는 왜 국제기구를 떠나 창업 불모지인 폴리테크(정치·정책 분야에 기술을 접목)에 뛰어들었을까. 지난 6일 정 대표를 중앙일보에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책 스타트업, 낯선 폴리테크
- 정책 스타트업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데 어떤 분야인가요?
- "정책 하면 '감시'를 떠올리고 시민단체나 정당의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산업 분야에도 정책이 중요해요.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할 때 각종 규제·정책을 고려했듯이, 기업은 정부 정책·입법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에요. 큰 기업이면 정책 매니저를 두거나 로펌·컨설팅 업체를 통해 정책 정보를 모으는데, 작은 기업은 정책을 몰라 회사가 망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희는 개인이나 기업이 투명하고 쉽게 정책에 접근하게 도와주는 스타트업이에요"
- 정책이라고 하면 너무 광범위 한거 같습니다. 어느 부분에 집중하나요?
- "법안이 핵심입니다. 사회적 이슈가 법이 되고, 법에 맞춰 룰이 생기거든요. 어떤 법이 추진되고 있는지, 통과는 될지, 국회의원의 성향은 어떤지 등 여러 정보를 계속 모으고 정리해요. 기업 입장에선 이런 정책 정보가 있으면 불확실성을 줄이고 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죠"
첫 결과물, '총선.kr'
- 총선후보자 정보사이트 '총선.kr'을 지난달 28일 선보였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죠?
- "정책을 따라가기 위해선 국회의원을 알아야죠. 의원정보를 수집하며 자연스레 선거 정보도 수집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별개 프로젝트로 '총선.kr'를 만들었어요. 깜깜이 선거 좀 그만하자는 생각에 3주간 매달려 사이트를 열었죠"
- 선거 정보 제공하는 곳이 많은데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 "자기 선거구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서 주소만 넣어도 선거구를 찾아 후보를 볼 수 있게 했죠. 후보 기초정보 외에 최근 SNS활동과 언급된 뉴스까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요. 공약을 보여주는 데도 공을 들였어요. 정당별 주요 10대 공약 등을 정리했죠."
- 코로나로 선거 관심도가 낮은데 반응은 어떤가요?
- "약 2만명이 접속(10일 12시 기준)했어요.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연령대는 18~24세, 다음이 25~34세였습니다. 밀레니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하지만 필요한 정보를 보기 쉽게 제공하면 다 찾아봐요. 총선 후엔 당선자 공약 이행과 의정활동을 추적할 계획이에요"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페이지도 선보인다고 들었습니다.
- "전 세계가 한국 정부의 코로나 대응을 주목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 무슨 정책이 있는지는 정보가 분산돼서 모르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별 재난지원금 등 한국의 코로나 정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준비 중이에요. 5월 중에 한국어와 영어로 선보일 계획입니다"
'디코드폴리시', 한국의 '피스컬노트'?
사실 코딧이 가장 공을 들이는 건 '디코드 폴리시'라는 정책 플랫폼이다. 입법정보, 의원 정보, 뉴스 등 정책 관련 데이터를 종합해 규제나 정책변화를 추적·예상하는 플랫폼이다. 코딧은 현재 20년 치 의안 정보를 모아 분류했고, 관련 뉴스 등도 8년 치를 모아 분석을 마쳤다. 정 대표는 "'총선.kr'같은 프로젝트나 코로나 정책사이트도 디코드 폴리시로 가는 경로 안에 있다"고 했다. '디코드 폴리시'는 올해 말 출시될 예정이다.
- 미국의 유명 폴리테크 기업 '피스컬노트'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피스컬노트가 정책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건 맞아요. 미국 50개 주 전체의 정책을 모아 인공지능(AI)으로 90% 이상 입법 예측까지 해주잖아요. 저희도 기본 구조는 데이터에 기반해 이슈를 분석하고,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 분석하는 거예요. 근데 구글이 있다고 네이버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미국과는 상황이 다른 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정책 분야에 특화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 구체적으로 어떤 특화된 측면이 있을까요?
- "한국 정책 결정 과정은 훨씬 복잡해요. 정당 구도, 사회 이슈, 여론 영향, 국회의원 특성 등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쳐요. 타다의 경우 AI라고 해도 지금의 결론을 예상하긴 힘들었어요. 특정 국회의원의 발언이나 관련 부처의 의견 등 정책 결정 과정 등 한국의 특수성이 있죠. 맥락을 아는 종합적인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필요해요. AI 기술에 빅데이터 기술 그리고 정책·입법 분야에서 일했던 분들의 네트워크로 데이터의 부족한 점을 채울 계획입니다"
- 기업이 정책 정보를 로비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지금처럼 큰 기업만 정책 정보에 접근한다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큰 기업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까지 정책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면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가 오히려 깨질 수 있어요.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게 정책 데이터를 공개할 예정이라 시민영역의 추적·감시가 강화될 수도 있죠"
"정년 보장된 국제기구 보다, 현실 변화 이끄는 게 매력적"
- OECD에서 일하다 창업했습니다.
- "OECD서 2013년~2015년까지 불공평을 해결하는 디지털 기술 정책을 다뤘어요. 그때 기술의 가능성에 눈을 떴고, 지금은 그걸 현실에 적용해 가는 게 즐거워요. 국제기구는 변화를 실현하기엔 너무 느렸거든요. OECD 정년보장(테뉴어)을 받은게 아깝기도 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 "OECD에서 배운 건 충분한 정보를 가진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결정에 차이가 크다는 점입니다. 정보가 진짜 중요한 거죠. 개인, 기업, 기관 모두가 인폼드 디시즌(informed decision, 충분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결정)할 수 있게 돕는 게 목표에요. 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 유럽의 정책 정보를 포괄하는 플랫폼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정원엽 기자 jung.wonyeob@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