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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가벼운 분담금 협상 홍보, 낙관이 낭패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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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민석
김민석 기자 중앙일보 전문기자

방위비 협상 ‘타결 임박’ 공개 배경은

경기도 평택 험프리스 미군기지가 코로나19 여파로 지난달 27일 바리게이트에 닫혀있다. 방위비분담금 합의가 늦어져 주한미군 운영도 어려워지고 있다. [뉴시스]

경기도 평택 험프리스 미군기지가 코로나19 여파로 지난달 27일 바리게이트에 닫혀있다. 방위비분담금 합의가 늦어져 주한미군 운영도 어려워지고 있다. [뉴시스]

2012년 10월. 국방부에선 긴장감이 흘렀다. 한·미가 20개월을 끌어온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이 사실상 타결됐기 때문이다. 양국은 발표 시점과 방법을 놓고 고민했다. 그동안 300㎞에 머물렀던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로 연장키로 했다. 하지만 협상 과정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미국은 사거리를 550㎞ 이내로 주장했고, 한국은 북한 후방지역의 탄도미사일을 제거하려면 800㎞는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회담 결과 일방 공개는 총선 의식 #국가간 협상은 동시 발표가 원칙 #합의 지연되면 주한미군 셧다운 #북핵·도발 우려, 합의 서둘러야

당시 언론은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발목을 잡는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국방부는 국내 여론을 미국과의 협상 지렛대로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점점 거세져 자칫 반미감정으로 진화할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반미감정을 불식하면서 한·미가 ‘윈-윈’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져 판이 깨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득달같이 사전보고를 요구하는 국회에도 언론 발표 직전에서야 알려줬다. 그만큼 국가 사이의 협상과 발표는 상대가 있어서 조심스럽다.

그런데 이번 방위비분담금 협상의 발표 과정을 보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다. 한·미가 지난해부터 파행을 거듭하며 8개월을 이어온 분담금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는 기사가 지난 1일 오전부터 보도됐다. 정은보 방위비분담금 수석대표의 지난달 31일 영상 브리핑에서 시작됐다. 다음날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분담금 타결을 기정사실로 하는 분위기였다.

이들의 발언은 이르면 1일 저녁 또는 다음날(2일) 오전에라도 ‘타결’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낭보였다. 협상 결과는 분담금을 10억 달러에서 ‘10% 인상 +α’(1조 2000억 원대)로 보도됐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당초 2020년 분담금으로 요구했다는 50억 달러(2019년의 5배)에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눈을 의심케 했다. 지난해 11월 방한한 제임스 드하트 방위비분담금 미국 대표는 “그(50억 달러)보다는 적다”고 했지만, 절반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국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양보했을까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정 대표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은 하루가 가기 전에 무너졌다.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의 질문에 클라크 쿠퍼 미 국무부 차관보는 2일(현지시각)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외교부도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사태가 꼬이자 청와대는 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고 “방위비분담금 협상의 조기 타결에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며 입장을 바꿨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잠정 합의를 먼저 공개한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한국 정부에 대해 ‘협상의 기본이 안 돼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김칫국 마시다’라는 문장을 리트윗했다. 그러나 ‘선의’라는 그의 해명에도 ‘김칫국’ 논란은 설익은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선제적 홍보가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뜻으로 들렸다.

미국 배제한 채 어설픈 언론 플레이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회원들이 지난 1일 평택 험프리스 정문 앞에서 강제 무급휴직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회원들이 지난 1일 평택 험프리스 정문 앞에서 강제 무급휴직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정부는 민감하고 중요한 협상이 타결될 국면에 오면 언론사에 엠바고 등 협조를 조심스럽게 요청한다. 엠바고란 특정 사안이 발표될 때까지 언론사가 보도를 유예해주는 것이다. 언론사가 공익 차원에서 엠바고를 수용하면 해당 부처는 물론,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협상 결과를 흘려도 언론사가 보도하지 않는 게 관례다.

그런데 이번 분담금 협상에선 이런 과정이 없었다. 도리어 정부는 미국을 배제한 채 홍보부터 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어설픈 언론 플레이에 따른 미국의 부인으로 ‘가짜 뉴스’를 생산한 꼴이 됐다. 정부 관계자의 설명은 ‘소식통’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됐다. 청와대도 숟가락을 얹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분담금 협상 내용을 언론에 설명해줬다고 한다. 그 성과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인 것처럼 포장됐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분담금 협상에 기여한 것처럼 부풀려졌다. 총선을 앞두고 해당 부처의 업적을 슬쩍 가로채는 듯한 모습이다.

낙관에서 낭패로 바뀐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 발언들

낙관에서 낭패로 바뀐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 발언들

외교부 등에 따르면 분담금 협상 과정이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지만,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정 대표 얘기처럼 잠정합의했다면 당초 올해 분담금으로 50억 달러를 요구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대폭 양보한 셈이다. 따라서 스스로 양보했다고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그가 좋아하는 트윗을 먼저 날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이 협상 결과를 먼저 공개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역정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 역정에 드하트 대표나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난처해진다. 트럼프의 성격으로는 잠정합의를 뒤집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꼬이는 형국이다. 정부의 성급한 성과 홍보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셈이다. 차라리 트럼프가 먼저 공개토록 해 명분을 살려주고, 한국이 실익을 챙겼으면 어땠을까. 김홍균 전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낙관이 낭패가 됐다”고 했다.

이번 분담금이 크게 불어난 것도 어쩌면 청와대의 자업자득이다. 2019년도 분담금의 협상 때 트럼프 대통령은 10억 달러(약 1조 2000억원)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로부터 1조 원을 넘기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그 지침에 따른 협상결과는 1조 389억원으로 2019년에만 적용되는 1년짜리 합의지만, 성공적으로 보였다. 만족하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분담금으로 50억 달러를 들고 나왔다. 지난해 미국 요구를 적절히 받았다면 10억 달러 수준에서 5년간 장기계약으로 종결됐을 것이다. 동맹을 돈으로 저울질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억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정부의 무리한 협상 원칙이 분담금만 불렸고, 한·미동맹도 흔들리게 됐다.

전략적인 접근 아쉬워

정부의 섣부른 홍보로 분담금 타결이 총선 이후로 지연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분담금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21대 국회에서 비준하려면 7∼8월은 돼야 한다는 관측이다. 그 사이 주한미군은 마비된다. 현재 무급휴직 중인 4000여 명의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가 8600여 명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주한미군 관계자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작전과 정보 등 거의 모든 부서에 근무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부대 운영이 걱정이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주한미군 셧다운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사실 분담금 협상은 위기의 한·미동맹 정상화에 좋은 기회였다. 협상에서 분담금 산정방식 변경, 북핵 위협에 대한 한·미 공동 대처방안 강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적극 참여 등 다양한 전략적인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처음부터 전략적 접근은 무시했다. 분담금 수석대표로 외교안보보다 숫자에 밝은 재정 전문가 임명이 말해준다. 이제 더는 이런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 분담금 협상 전략과 발표 과정 전반에 대해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야무야하지 않길 바란다.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 선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