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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도 장관이 정한 양식만 쓰라고? 규제 만능주의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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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부산 해운대구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규제혁신은 생존의 문제로, 정부는 이를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고 기업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부산 해운대구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규제혁신은 생존의 문제로, 정부는 이를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하고 기업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 SK그룹 계열사인 SK엔카는 2016년 중고차 거래 시장에서 매출 9000억원으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듬해 지분을 모두 정리했다. 중고차 매매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까닭에 사업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SK엔카가 철수하고 난 자리는 국내 중소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들이 차지했다. 벤츠·BMW·렉서스·아우디·재규어랜드로버·볼보 등 6개사의 중고차 판매량은 SK엔카 철수 후 1년이 지난 후 약 2만5000대에 달했다. 3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코로나에 울고 규제에 우는 기업들 ②

20대 국회서 나온 새 규제 19대의 3배

크게 늘어난 규제법안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크게 늘어난 규제법안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SK엔카의 빈 자리가 외국 업체로 대체된 사이, 정부와 국회는 바뀌었지만 경제·산업계를 옥죄는 규제는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훨씬 늘었다. 7일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0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2016년 5월30일부터 이날까지 의원들이 발의한 규제 법안은 총 3907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규제 조항 7261개가 새롭게 생겨났다.

앞선 19대 국회의 규제법안(1355건), 규제조항(2542개)보다 약 3배나 많다. “업종과 권역이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규제혁신은 생존의 문제(2019년 7월24일)”라며 기존 규제를 면제·유예시켜주는 ‘규제 샌드박스’를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6촌, 4촌 금융정보까지 탈탈

지난해 10월 말 통과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의 경우 체납액이 5000만원 이상인 경우 본인 뿐 아니라 그 배우자와 6촌 이내 혈족과 4촌 이내 인척까지 국세청이 동의 없이 금융거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기업인의 탈세를 막겠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의 과도한 침해라는 지적이 많다.

2018년말 통과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위험성 높은 작업의 외주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근로자의 안전을 고려한 것이라지만, 기업의 자율성 침해는 둘째치고 도급을 받아 생계를 잇는 중소 업체들의 경영난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일명 ‘화평법’으로 불리는 ‘화학물질등록·평가법’으로 속앓이를 하는 기업들도 많다. 이 법은 연간 1t 이상의 화학물질을 만들거나 수입하는 기업은 모든 화학물질을 사전에 신고하도록 했는데 미국(10t 이상) 등에 비해 기준이 크게 엄격하다. 한 타이어 업체는 “신규 물질 등록에만 10~12개월이 걸려 생산이나 신제품 개발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며 "소비자 노출이 없는 산업용 화학물질에 한해서라도 신고·등록 기간을 단축해 달라”고 호소했다.

20대 국회 기업규제 주요 법안.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20대 국회 기업규제 주요 법안.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불공정 행위로 손해나면 국민참여 재판? 

이 밖에 국회에는 ▶불공정거래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에 국민 참여 재판을 도입하는 법 ▶임직원의 범죄에 기업이 직접 형사책임을 지는 법 등 감정적인 징벌로 이어질 수 있는 법들도 계류 중이다. 사업 연관성이 없으면 증손회사로 둘 수 없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을 본 A사는 “2000년대 경공업을 하다가 중공업으로 바꿔보려고 하는데, 이 법이 통과되면 사업 재편이 어렵다”고 걱정했다.

채용절차의 공정성을 도모한다며 직원 채용 시 고용노동부장관이 정한 표준 이력서 양식을 사용하게 하고, 면접 평가 때도 업무 활동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할 수 없게 하는 ‘채용절차법 개정안’은 날로 다양해지는 기업별 인재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발상이란 평가를 받는다.

“경제·기업 아는 의원 드물어요” 

이런 규제들은 왜 늘어나는 걸까. 익명을 요구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은 “진영 논리와 전문성부족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대기업과 사회적 약자를 대립적 구도로 보다보니 특히 대기업을 규제하는 조항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문성 부족이다. 이 보좌관은 “(의원 중에) 경제나 산업 분야를 직접 경험하고 온 사람이 거의 없고 본인의 논리나 기준도 명확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시류에 탄 입법을 해놓고 보도자료 띄우고 (법안이) 통과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라며 “조금만 진지하면 국회의원만큼 기업인이나 전문가들 불러 공부하기 좋은 위치가 없는데 의지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100개 규제 공약 나오면 몇 가지는 꼭 실현"  

재계에선 오는 15일 총선으로 꾸려질 21대 국회에서 또 어떤 규제 법안들이 양산될지 벌써 긴장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 강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확대, 법인세율 인상, 최저임금 추가 인상, 복합쇼핑몰 개점 규제 등이 대표적 이슈다.

국내 10대 그룹에서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한 임원은 “기업 입장에서 선거철은 자극적인 공약과 법안의 퍼레이드 기간이다. 희생양을 만들고 사회적 비용만 발생시키는 공약들이 난무한다”며 “말도 안 되는 규제 공약이 100가지 나오면 그중에 몇개는 꼭 실현된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의원들이 발의하는 규제 법안도 정부가 내는 법안처럼 사전에 그 효과를 객관적·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규제영향 평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각 정당에 정책 제언을 전달하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규제 완화’가 기업 경쟁력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기업들을 생존 위기로 몰아넣은 지금이야말로 규제를 완화하고 개선할 ‘골든타임’이라고 본다. 각종 규제를 풀 경우 정부가 별도의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투자에 나설 여지가 늘어나고, 코로나 19 종식 이후 재편될 세계 산업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정부가 내놓은 코로나19 기업 지원책은 대부분 현금 지급이나 중소기업 지원, 소상공인 대출 등에 집중돼 있다.

해외 주요국이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법인세 등 세금을 인하하거나 관련 규제를 대폭 풀고 나선 것과 차이가 있다. 미국은 원격진료 등 헬스케어 분야 규제 완화를 비롯해 법인세 추가인하와 항공업계 등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독일과 스페인 등도 수출 기업을 포함한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섰고, 일본은 대기업들의 공급망 재구축 지원을 서두르고 있다. 〈표 참조〉

주요국의 코로나19 기업 관련 지원정책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주요국의 코로나19 기업 관련 지원정책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신동엽 연세대학교 경영대 교수는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푸는 것으로는 재정 건전성을 도모할 수 없고, 그 효과에도 한계가 있다”며 “언제 끝날지 모를 고위험 속에서 생존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을 (돈으로) 도와줄 순 없어도 (규제를) 풀어줄 순 있다”며 “지금은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규제를 풀어 위기 이후 지속가능한 경제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이소아·강기헌·이수기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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