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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일본바둑 버팀목은 3대 기전, 그 시작은 한 사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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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일본의 일인자 이야마 유타 9단은 2015년 1억7200만엔(약 20억원)을 벌어 세계 최다 상금 기록을 세웠다. 기존 기록은 이세돌 9단의 14억원. 메이저 세계대회서 일본이 우승한 것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세계 상금 1위 자리는 주로 일본기사 몫이다. 왜일까. 일본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김옥균 덕에 인생 바뀐 슈사이 #노벨상 작가가 은퇴대국 해설

일본바둑의 버팀목은 바로 일본 3대 기전이다. 요미우리의 기성전(우승상금 5억1000만원), 아사히의 명인전(우승상금 3억4000만원), 마이니치의 본인방전(우승상금 3억2000만원)은 상금뿐 아니라 예선부터 도전기까지 모두 대국료를 지급한다. 일본기원이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기성전의 총 규모는 메이저 세계대회의 2~3배일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바둑의 인기가 쇠락해 사방이 힘든 현실인데도 3대 기전은 꿋꿋하다. 그 이유를 찾아 3대 기전의 연원을 쭉 따라가 보면 의외로 한 세기 전의 기인인 슈사이(秀哉)라는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본명은 다무라 호쥬. 11세 때 바둑에 입문했으나 18세가 될 때까지 초단 면장도 받지 못했다. 기사생활에 혐오감을 품고 바둑을 떠나 다양한 밥벌이를 도모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배를 곯았다. 절간 주지의 바둑 상대로 풀칠을 하기도 했고 미국 이민도 꿈꿨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조선의 망명객 김옥균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본인방 가문에 들어가면서 그는 비로소 날개를 편다. 슈사이는 21대 본인방 자리에 올랐고 곧 종신제인 명인에 추대된다.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기원의 대표 슈사이와 반대편의 최강자 가리가네 준이치의 대결을 기획했는데 이게 신문의 부수를 일약 3배로 끌어올린다. 상상 이상의 대성공을 거둔 요미우리는 슈사이 대 우칭위안의 대결을 연속 기획했다. 이 대국도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요미우리의 성장사에서 바둑은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이번엔 마이니치 신문이 슈사이를 설득했다. “시대가 변했다. 본인방 자리는 세습이 아니고 최강자 몫이어야 한다.” 슈사이는 본인방 이름을 마이니치에 넘겼고 은퇴를 선언했다.

1938년 슈사이 명인 은퇴바둑은 공전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평생 한판도 지지 않아 ‘불패의 명인’으로 불리는 슈사이, 상대는 선발전에서 전승을 거둔 29세의 기타니 미노루 7단. 칫수는 기타니의 정선. 67세 노년의 슈사이가 오히려 6집반을 접어준 셈이다. 제한시간은 사상 최장인 각 40시간.

이 대국은 6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끝난다. 신문 관전기는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맡았다. 그는 이 한판의 기보를 64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근육 하나 없는 무릎으로 꼿꼿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불패의 슈사이, 그의 마지막 제물이 되지 않고 기어이 새 시대를 열고 싶은 기타니. 가와바타는 이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지내며 명인의 투혼과 기타니의 집념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결과는 기타니의 5집승. 키 1m50cm, 체중 30여kg의 슈사이는 이 한판에 모든 걸 쏟아붓고 1년 뒤 죽음을 맞이한다.

슈사이의 죽음 2년 뒤인 1941년 마이니치의 본인방전이 개막됐다. 최초의 프로기전이다. 종신제였던 명인도 기전 이름이 됐다. ‘명인’이란 이름을 놓고 신문사 소송사건이 있었고 중재를 통해 요미우리가 서열 1위 기성전, 아사히가 명인전을 맡으며 3대 기전이 정립되었다. 바둑대회의 규모는 신문사의 위상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요미우리는 ‘랭킹1위’를 고수했다.

3대 기전은 지금도 제한시간 8시간의 ‘이틀걸이’ 바둑을 두고 도전기는 여전히 전국의 명소를 전전하며 열린다. 10년 가까이 예산을 올리지 못했고 본인방전이 위험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3대 기전은 영광과 추억을 되새기며 여전히 일본바둑을 지탱하고 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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