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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2500개 물류센터···“제조업 아니라서” 4년 허송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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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쿠팡은 지난해 말 대구 국가산업단지(이하 국가산단) 부지에서 초대형 물류센터 착공식을 했다. 2021년까지 7만8825㎡(약 2만3890평) 부지에 연면적 32만9868㎡(약 9만9960평)의 초대형 풀필먼트 센터(Fulfillment Centerㆍ상품의 입고, 보관, 출고가 한 곳에서 이뤄짐)를 짓는다는 목표다. 투자 비용은 약 3200억원에 이른다. 이를 통해 대구에서만 2500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코로나에 울고, 규제에 우는 기업들 ① #산업·주거 용지 비율 정해진 탓 #“전통적 업체 잣대로 규제 답답” #쿠팡, 대구물류센터 착공에 4년 #‘제조업체만 입주’ 규정이 발목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인 대구광역시도 전폭적으로 미는 물류센터가 착공되기 까지는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빛의 속도로 늘어나는 온라인 상거래에 대응하기엔 지나치게 긴 기간이었다. 대구시와 쿠팡이 ‘친환경 첨단 물류센터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은 2015년 11월. 국가산단에는 제조 업체만 입주할 수 있다는 규제 때문이었다. 대구시가 국토교통부를 설득해 오케이 싸인이 떨어진 것은 거의 3년이 지나고 난 2018년 12월에서의 일이다.

#제주 첨단과학기술단지(이하 제주단지)의 정보기술(IT)기업인 A사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합병과 잇따른 사업 영역 확대로 제주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수도권으로 옮겨 가면서 제주 단지의 이 회사 부지에 유휴 공간이 늘고 있어서다. A사는 이 놀고 있는 공간 중 일부에 자체 브랜드 매장을 내는 투자를 고려 중이다. 제주특별자치도도 관광객을 많이 모으고 매장 판매 일자리도 늘릴 수 있는 이 계획에 호의적이다.

하지만, A사의 계획은 일단 ‘스톱’ 상태다. 제주단지의 경우 산업시설용지와 주거시설용지 등의 비율이 명시돼 있어, 브랜드 매장 같은 판매 시설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IT 기업의 사업환경이란 게 늘 역동적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이걸 전통 제조업의 잣대로 규제하려 하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했다.

대구시 북구 제3산업단지관리공단 거리에 공장매매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관리공단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공단 내 대부분 공장에 신규발주는 나오지 않고 기존의 발주도 취소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대구시 북구 제3산업단지관리공단 거리에 공장매매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관리공단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공단 내 대부분 공장에 신규발주는 나오지 않고 기존의 발주도 취소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해묵은 규제들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신음하는 기업의 어깨에 규제라는 돌덩이까지 얹혀있는 상황이다.

해외 경쟁자들은 이런 규제로부터 자유롭다. 한 예로 중국 후난성 창사고 신지구에는 인터넷, 신재생에너지, 신소재, 바이오ㆍ의약 등 신산업 분야 기업 3만2000여개(2019년 11월 기준)가 입주해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IBM, 지멘스 등 외국 기업 지사도 200개에 이른다. 한국의 산업단지와 달리 창사고 신지구에선 관련 기업들이 자신들이 입주한 곳에서 어떤 사업을 펴던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중국 현지 기업은 1일, 외국 기업은 3일이면 모든 설립 절차를 끝내고 입주할 수 있다. 이진수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국은 특정 분야만 제한하고 다른 기업 활동은 대거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한국은 허용하지 않는 건 차단하는 포지티브 규제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산업단지 혁신 및 건설 일자리 지원대책 당정협의가 지난해 1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의락 제4정조위원장,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 비서관, 이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윤관석 의원. 임현동 기자

산업단지 혁신 및 건설 일자리 지원대책 당정협의가 지난해 1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의락 제4정조위원장,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 비서관, 이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윤관석 의원. 임현동 기자

한국의 산업단지가 산업구조 변화와 무관하게 제조업을 전제로 짜여 있다보니 산업단지 전반의 활력도 떨어진다. 한 예로 지난해 전국 38개 국가산단의 생산액은 486조6622억원으로, 이는 전년보다 10%가 줄어든 수치다. 수출액은 더 많이 줄어 전년 대비 16.6% 감소한 1530억3600만 달러(약 185조 9800억 원)을 기록했다. A사 관계자는 “일률적으로 토지의 이용 목적을 정해 놓을 게 아니라 우리 같은 IT기업들의 특성에 맞게 부지를 활용할 수 있게 경직된 규정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중심으로 산업단지의 용도를 묶어놓다보니, 산업단지의 분양률도 떨어지고 있다. 한 예로 전북 고창군의 일반산업단지의 경우 미분양률은 96%(2019년 5월말 기준)에 이른다.

지역별 산업단지 미분양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지역별 산업단지 미분양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석화업계 “정기보수 100억 더 들고, 안전사고 두렵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열린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단체장 공동면담에서 '근로시간, 환경 규제개선 중소기업계 건의서'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전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열린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단체장 공동면담에서 '근로시간, 환경 규제개선 중소기업계 건의서'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전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산업단지 등의 토지이용 규제가 대표적인 물리적 규제라면 ‘주 52시간 근무제’ 는 기업의 일하는 방식 자체를 옥죄는 규제로 꼽힌다. 지난해 11월엔 중소기업중앙회ㆍ벤처기업협회ㆍ소상공인연합회 등 14개 중소기업 단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중소기업이 주 52시간제 도입 준비를 못 했다”며 “현장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 52시간제 시행시기를 1년 이상 늦춰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탄력근로제 적용 기간을 6개월로 늘리는 논의 등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논의만 여태 진행중이다. 그러는 사이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한 산업계 효율성 하락은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의 타격을 정면으로 받는 석유화학업계가 대표적이다.

석유화학 공장의 경우 1~4년마다 한 번 법적으로 꼭 해야 하는 정기보수(T/A)가 골치꺼리로 등장했다. 실제 지난해 공장 전체를 세우고 40여일동안 24시간 정기보수(T/A)를 한 B 석유화학업체가 대표적이다. 2조2교대, 조당 12시간씩 연속 정비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 이번 정기 보수는 기존 30여일보다 열흘 정도 더 걸린 40여일 만에 끝났다.100억원이 넘는 추가 비용도 들었다. 주 52시간 시행에 따라 같은 시간에 투입되는 인력을 늘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용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안전도 문제다. 이 회사 관계자는 “숙련된 공사 인력을 주당 52시간만 투입하다 보니, 그 빈자리에는 경험이 적은 미숙련 인력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다 보니 정비 기간에 아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녔다”고 토로했다.

코로나 19로 한창 바쁜 대출 업무를 하느라 주 52시간을 지키지 못해 은행장이 고발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IBK기업은행 노동조합은 지난달 주 52시간 근로제 위반을 이유로 윤종원 기업은행장을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했다.

지자체는 규제 풀고 싶다는데, 중앙정부는 묵묵부답

지방자치단체가 규제를 풀어주고 싶어도 중앙정부의 미온적 태도 등으로 흐지부지되는 상황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 매출이 급감해 고통받는 기업들을 위해 교통유발부담금을 줄여주는 방안을 국토부에 문의했지만 이렇다 할 답을 아직 받지 못했다. 교통유발부담금은 도시교통정비촉진법에 규정돼 있어 지자체가 임의로 처리할 수는 없다. 서울시가 지난해 거둔 교통유발부담금 규모는 1700억원에 달한다.

이와 관련, 서울시 관계자는 “교통유발부담금뿐 아니라 각종 규제의 적용, 완화와 관련해 중앙 부처에 문의해도 이렇다 할 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같은 공무원끼리 물어도 이 정도인데, 기업은 오죽하겠냐”라고 반문했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현재 정부는 긴급 금융 등 기업의 유동성 지원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규제 혁파를 통해 코로나 19 사태 이후 기업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수기·이소아·강기헌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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