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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천국' 韓···수백통 전화해도 무죄, 애완견 죽여도 집유

중앙일보

입력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지난달 25일 종로경찰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지난달 25일 종로경찰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강정현 기자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25)의 12가지 혐의 중엔 살인음모가 있다. 그에게 피해 여성들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전직 사회복무요원 강모(24)씨가 자신이 7년간 스토킹했던 고등학교 교사 A씨의 딸을 살해해 달라며 조씨에게 400만원을 건넸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서 재점화된 솜방망이 스토킹 처벌

A씨는 이 사실이 알려진 지난 29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여아 살해를 모의한 공익근무요원 신상공개를 원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잘못된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글을 올린다"고 적었다. 이 청원에 참여한 시민들은 5일까지 48만여명에 달한다. 여성계에선 이 A씨의 절절한 외침 속에 스토킹 범죄에 대한 한국사회의 입법 공백과 솜방망이 판결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주빈 공범의 스토킹 범죄 

A씨에 대한 보복·협박 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는 강씨는 총 세 차례에 걸쳐 A씨에 대한 상습협박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2012년 16세 때 받은 첫 수사에선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 2018년 3월에 상습협박 혐의로 다시 수사를 받고 기소돼 1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또 A씨와 그의 가족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해 지난 1월 다시 재판에 넘겨졌다.

조주빈의 공범 강씨에게 스토킹을 당한 피해자 A씨가 청와대에 강씨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청와대 청원게시판 캡처]

조주빈의 공범 강씨에게 스토킹을 당한 피해자 A씨가 청와대에 강씨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청와대 청원게시판 캡처]

2018년 강씨의 1심 판결문을 보면 강씨는 불법적으로 A씨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내 "언제, 어디서 살인·방화·납치·자살을 시도할지 모른다" 등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편지와 문자를 반복해 보냈다. 하지만 형량은 1년 2월에 불과했다. 검찰은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했지만 법원은 "피고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정신과적 증상 등이 있다"며 원심 형량이 적정하다고 판결했다.

그렇게 출소한 강씨는 이름과 주민번호를 바꾼 A씨를 다시 살해 협박하고 A씨의 딸 살해를 모의했다. 부장판사 출신인 도진기(53) 변호사는 "스토킹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이나 피해가 스토킹 범죄 피고인의 형량에 반영되지 않는 솜방망이 처벌 사례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스토킹 솜방망이 처벌들 

법조계에선 강씨가 그래도 엄벌하는 판사를 만나 드물게 실형을 산 편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현행 법령상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조항은 없다. 그래서 판사들은 협박이나 정보통신법 위반(공포심·불안감 야기 문언 반복 전송) 조항을 빌려 판결한다. 그러다 보면 각 조항의 형량이 높지 않아(협박=징역 3년·벌금 500만원 이하, 정보통신법 위반=징역 1년·벌금 1000만원 이하) 피고인에게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5년 전주지법은 피해자에게 "네 가족을 멸족시키겠다"며 87회가량의 협박 문자를 보내고, 피해자 가족 자택에 침입해 애완견 두 마리를 밟아 죽인 피고인 40대 남성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고인의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500만원 공탁이 유리한 양형사유가 됐다. 지난해엔 충남 서천에서 50대 여성을 스토킹했던 60대 남성이 집행유예를 받은 뒤 해당 여성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주영글 변호사는 "스토킹 범죄는 겪어보지 않는 이상 공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솜방망이 처벌에 방치된 스토킹 범죄가 살인으로 발전하는 비극도 있다"고 말했다.

2019년 7월 당시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스토킹 범죄 관련 대정부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7월 당시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스토킹 범죄 관련 대정부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뉴스1]

5번의 국회, 14개의 방치된 스토킹 법안

15대 국회 때부터 스토킹 범죄 처벌에 대한 입법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지난 20년간 총 14개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방치된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2018년엔 법무부가 스토킹 방지법을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스토킹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에 실제 법안은 발의하지 않았다.

지난달 대법원은 다툰 여자친구에게 자동프로그램을 활용해 하루에 수백통의 전화를 건 남자친구 B씨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법조계에선 이 사건이 스토킹 범죄의 입법 공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본다. 한 여성의 일상생활을 망가뜨린 수백통의 전화를 처벌할 법률조항이 없었다는 것이다.

n번방 논란 이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 양형 의견 1만 5000건을 모은 김영미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스토킹 범죄에 대한 양태가 협박으로만 한정하기엔 정말 다양하다. 맞춤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이현곤(51) 변호사도 "스토킹 범죄에선 가해자 처벌만큼 피해자 보호가 중요하다. 판사가 스토킹 가해자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고 싶어도 현행법상 법령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가운데)등 여야 의원들이 지난달12일 국회에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발본색원'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가운데)등 여야 의원들이 지난달12일 국회에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발본색원'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대 국회에선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이 '스토킹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을 대표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한 채 임기말을 맞았다. 정 의원은 "친밀한 관계에서의 스토킹 범죄와 재범에 대해 가중요소를 두고, 스토킹범죄의 예방과 피해자 보호·지원을 국가의 책무로 두는 법률의 조속한 통과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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