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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탄탄한 재정·금융, 의료체계와 산업기반,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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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코로나에서 살아남을 국가의 5대 조건

이탈리아는 5일 희생자가 1만5000명을 돌파하면서 국가적 재난 상황에 빠져 있다.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지난달 27일 군용 트럭에 실려온 관이 공동묘지 영안실에 들어서고 있다. [AP=연합뉴스]

이탈리아는 5일 희생자가 1만5000명을 돌파하면서 국가적 재난 상황에 빠져 있다.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지난달 27일 군용 트럭에 실려온 관이 공동묘지 영안실에 들어서고 있다. [AP=연합뉴스]

전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싸우고 있다. 거의 모든 나라가 사실상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진원지였던 중국은 우한을 통째로 봉쇄하는가 하면, 뒤늦게 감염자가 속출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을 통해 비상 자금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풀고 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보지 못했던 신속하고 과감한 위기 대응 조치들이다.

미국·일본은 돈 찍어내면서 버텨 #이탈리아는 재정 악화로 위기 가중 #의료체계 부실하면 맥없이 무너져 #산업기반 튼튼해야 경제 활동 영위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주요국이 연일 전례없던 재정과 금융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금융시장 불안과 경제 불황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3개월여 지나가면서 어느 나라가 잘 버티고 있는지, 어느 나라가 더 힘들어하는지가 조금씩 판가름나고 있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핵심 조건은 크게 다섯 가지로 추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와 둘째는 재정과 금융이다. 코로나 사태가 악화하자 가장 먼저 발작한 곳은 금융시장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게 호황을 구가한 미국 증권시장은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연초 최고점 대비 최대 30% 폭락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즉각 재정과 금융을 동원해 시장 불안 해소에 나섰다. 연방준비제도(Fed)는 더 낮출 여지가 없는 데도 불과 보름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1.25%포인트나 낮추는 ‘빅컷’을 단행했다. 그래도 금융시장의 불안이 계속되자 2조 달러의 재정을 투입하기로 하더니 또다시 2조 달러 추가가 논의되고 있다. 개인소득 9만9000달러 미만 소득자에게 최대 1200달러까지 차등 지급하는 긴급 지원금도 마련했다.

복지 포퓰리즘으로 위험 증폭

한국기업, 국가채무

한국기업, 국가채무

미국의 이런 움직임에 세계 각국에서도 재정과 금융 공급을 최대한 확대하고 나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탈리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팬데믹에 빠지면서 비상이 걸렸다.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해야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이미 재정 상태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일본·영국 같은 나라들 역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대한 국부를 쌓아놓은 이들 나라는 급한 대로 국채를 찍어 얼마든지 재정을 확장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탈리아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탈리아는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이미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크게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FT는 “이탈리아를 지원하려면 결국 유럽연합(EU)이 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도와주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유럽연합에 5000억 유로(약 700조원)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이탈리아는 위기 상황에서 재정과 금융 건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축통화국 미국과 준 기축통화국 일본은 돈을 바로 찍으면 된다. 위기가 찾아오면 안전자산인 달러화와 엔화에는 오히려 수요가 몰리는 게 현실이다. 인플레이션 같은 후유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기에 급한 불을 끄고 보는 데는 경제 강대국이 유리하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한국은 재정과 금융이 아슬아슬한 상황에 빠져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복지 포퓰리즘이 만연하면서 한국은 올해부터 재정적자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여기에 11조7000억원 규모의 추경에 이어 100조원 규모의 금융 특별조치와 소득 하위 70%에 대한 4인 가구 100만원 긴급 지원까지 시행되면서 재정적자는 더 커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부양을 저금리에 의존해 온 결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가 0%대로 내려와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재정과 금융의 건전성이 매우 취약해져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국가 내부의 산업생태계 탄탄해야

주요국 코로나19 사망자

주요국 코로나19 사망자

코로나 사태 대응에 필요한 셋째와 넷째 조건은 의료체계와 산업기반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의료체계의 중요성을 보자. FT는 “지금 패닉 상태에 빠지느냐 통제가 가능하냐의 핵심 변수는 의료체계의 안정성 여부”라고 지적했다. 사망자가 속출한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이탈리아·스페인·이란은 의외로 의료체계에 구멍이 뚫려 있다. 가장 심각한 이탈리아는 일찍이 선진국이 되면서 재정을 화수분인 양 여겨 복지 지출을 거침없이 늘려나갔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구호처럼 이탈리아는 빚을 얻어서라도 복지를 확대했다. 복지 확대는 결국 의료에도 스며들면서 진단·치료·입원이 모두 공짜로 제공되는 ‘의료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됐다.

결과는 참담하다. 사회주의는 모든 게 공짜라고 하지만 상점에는 물건이 없다는 게 현실이다. 팬데믹이 오면 감당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이다. 설상가상으로 복지 포퓰리즘으로 재정이 악화하면서 이탈리아의 국가부채는 GDP의 130%를 웃돈다. 미래 세대의 돈을 끌어다 파티를 벌였지만, 비상시에는 신용도가 떨어져 국채 발행도 불가능한 처지가 됐다. 여러 유럽 전문가들이 “재정 지원이 없으면 이탈리아의 코로나 사태 비극을 멈추기 어렵다”고 FT에서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원칙론을 접고 이탈리아를 지원하기로 나선 것도 이탈리아 스스로는 위기 극복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넷째 조건으로 꼽힌 산업 기반 역시 코로나를 극복하는 핵심 변수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 경제는 글로벌 공급사슬(GSC)의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서 과다한 투자는 이번처럼 위험을 증폭시킬 수 있어서다. 앞으로 오프쇼어링(해외 진출)의 흐름이 리쇼어링(본국 회귀)으로 빠르게 바뀔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블룸버그와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글로벌 매체에서 늘어나고 있는 배경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선방이다. NYT는 코로나 감염이 심각했던 대구 시민의 차분한 대응을 조명하면서 경이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비해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는 물론 일본에서도 사재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그 차이는 탄탄한 산업 기반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의외로 산업 생태계가 오밀조밀하게 잘 짜여 있다. 부품 생산 능력과 완제품 생산 역량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나라다. 중국은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고, 미국은 첨단 설계를 주도하면서 실질적인 생산 시설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씨젠이 신속하게 진단키트를 생산해 낸 것이 좋은 사례다. 산업 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유사시 제품 생산이 신속할 수 있다. 마스크 역시 초반에 중국에 과다하게 수출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대란은 겪지 않았을 터다. 특히 한국은 전자상거래와 배달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사재기 현상을 누르러뜨렸다. 한국에서는 비누 한 장도 익일 배송이 가능하다. 쿠팡 같은 배송 업체의 역할이 컸다. 국민 대다수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같은 ‘원마일 코스트(one mile cost)’가 없다. 미국은 집과 집의 거리가 크게는 1마일씩 떨어져 있어서 전기와 수도를 공급해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리더십은 위기관리의 핵심 변수

비상 상황이 되자 각국 지도자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은 정보를 통제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사회주의 체제의 통제력으로 우한을 통째로 봉쇄해 사태 악화를 막았지만, 이런 리더십이 코로나 이후에도 얼마나 먹힐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팬데믹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해 중국에서 이미 46만 명이 미국에 입국한 뒤 뒷북 방역에 나서는 바람에 코로나 확산을 막지 못했다고 NYT가 지적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올림픽 사수를 위해 머뭇거리다 뒤늦게 감염이 확산하면서 장기 집권이 불투명하게 됐다. 반면에 조기에 중국에서의 입국을 차단한 대만·싱가포르·홍콩·베트남은 사망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국은 가장 안타까운 경우다. 대한의사협회가 진작에 중국에서의 입국을 차단하라고 7차례나 권고했지만, 어처구니 없는 중국 눈치를 보면서 문을 활짝 열어뒀다. 그 바람에 한국인 출입을 제한하는 국가가 180개로 늘어나고, 코로나로 희생된 국민은 183명에 이른다. 산업화 시대에 기초를 마련한 의료체계와 산업 생태계가 없었다면 피해가 얼마나 더 커졌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향후 코로나 대응에서도 리더십 리스크는 최대 변수가 될 수 있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