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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직격인터뷰

“마약수사처럼 함정수사해야 아이들 구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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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 위원장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이뤄진 끔찍한 디지털 성착취 사건. 운영자 조주빈이 붙잡힌 ‘박사방’과 ‘n번방’ 실태가 알려지면서 공분이 일고 있다. ‘박사방’의 경우 피해 여성 75명 가운데 16명이 미성년자다. 1990년대 말 ‘소라넷’을 필두로 플랫폼을 바꿔가며 계속된 디지털 성착취 사건을 국가가 방조한 것이 오늘 사태를 불렀단 비판이 많다. 법 체계를 다듬고, 솜방망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피해자보다 가해자 편들어온 국가 #왜곡된 성문화가 n번방 키워냈다 #처벌 강화 만큼 예방 조치 급선무 #아동청소년 성범죄 전담기구 필요

2000년 아동청소년성보호법(아청법·당시는 청소년성보호법) 제정의 산파 역할을 한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을 만났다. 훗날 여성가족부에 통합된 국가청소년위원장(2005~2008년)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평생을 아동청소년 성범죄와 싸워왔다. 현재 아동청소년단체 ‘탁틴내일’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범죄 처벌 강화도 중요하지만, 피해 발생 이전 단계의 예방적 대책, 왜곡된 성문화 개선 등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공분하는 만큼 성인 여성 대상 범죄에도 분노해달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공분하는 만큼 성인 여성 대상 범죄에도 분노해달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n번방은 역대급 범죄다.
“디지털 성범죄가 날로 악랄해지지만, 이건 사람을 잡아다 아예 노예로 삼았다. 그 많은 회원 중 누구 하나 신고할 생각을 못 했다. 아마도 평범한 남성들이 ‘이 여자들은 자기가 당할 여지를 줬을 것’이라며 죄의식 없이 즐겼을 거다. 평범한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방조한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떠오른다.”
소라넷부터 잡았어야 했다는 말이 많다.
“90년대 여성민우회 활동할 때부터 인터넷 채팅이나 ‘영계 문화’로 아동 청소년을 성매매 대상으로 삼고 유인하는 게 굉장히 심각했다. 청소년·여성단체들과 2년 넘게 싸워서 아청법이 만들어졌다. ‘광진구 김개똥’씨 수준의 성범죄자 신상공개를 얼굴공개로 하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친고제 폐지나 공소시효 폐지는 10~15년 걸려 이루어졌다. 가슴 아픈 게 그사이에 너무 많은 아이가 죽었다. 왜 5년 후를 내다보지 못하고, 희생을 당한 다음에야 꽁무니를 쫓아 법을 만드는가. 마치 누군가 죽어 나가길 기다렸다가, 범죄를 뒤쫓아 다니는 게 법 같았다.”
정치권은 일제히 n번방 재발방지법안 마련을 약속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국회의원들은 전담팀 만들고 새로운 법안을 만든다. 3년형을 5년으로 올리고, 이럴 땐 센 법안이 인기다. 하지만 법이 금방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시간이 흘러 국민의 분노와 열기가 식으면 이해 당사자들, 그걸로 돈 버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로비하면서 발목을 잡는다. 사실 법의 형량 자체는 지금도 낮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낮은 양형기준으로 법원이 방치하는 게 문제다. 법원은 법과 양심을 가지고 재판한다는데, 법조문은 가졌어도 양심은 없었다. 10세 소녀를 35살 학원 원장이 채팅으로 유인해 소주 먹인 후 양팔을 못 움직이게 누르고 성폭행한 사건이 있다. 가해자는 ‘어린아이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2심 법원은 ‘협박, 폭행 증거는 아이 진술밖에 없는데 신빙성이 없다’며 1심 징역 8년을, 2년으로 낮췄다.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은 징역 5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줄 수 있는데 ‘초범이다’ ‘반성한다’며 기소유예, 집행유예를 때린다. 경찰, 검찰, 법원 모두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따진다.”
지금 필요한 해법이 있다면.
“n번방은 알바를 미끼로 피해자를 유인했다. 이 단계에서 적극적인 위장수사, 함정수사를 해야 한다. 영국 경찰청의 아동청소년 성범죄 수사를 참관한 적 있다. 얼굴을 합성한 가상의 여자아이가 채팅앱으로 런던 하이드 파크 분수대에 빨간 목도리를 하고 가겠다고 쪽지를 보내 현장에 나온 성인 남성 17명을 잡았다. 이 사람들 집에 가보면 반드시 컴퓨터에 아동 포르노가 있다. 주머니에 콘돔까지 챙겨온 사람도 있다. n번방도 여대생 두 명이 위장 잠입해서 취재하고 공론화한 거 아닌가. 마약 수사 수준의 함정수사를 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성매수자로 위장하는 수사는 한다. 그런데 미성년자로 가장하면 법원이 인정을 안 해준다. 채팅 앱에 16살 여자라고 접속하면 십분 안에 수십 개 메시지가 쏟아진다. 성매수자들이 상대가 경찰일 수 있다고 조심하는 것만으로도 범죄예방 효과가 있다.”
온라인 그루밍(길들이기)의 처벌도 시급하다.
“성범죄를 목적으로 채팅앱, SNS를 이용해 피해자를 꾀어내는 과정인 온라인 그루밍(grooming)은 청소년 성범죄의 출발이다. 그루밍을 범죄로 보지 않으니 아이가 동의, 합의한 게 된다. 이번에 법제화 논의가 있으니 반드시 통과되길 바란다. 영국 국가범죄수사국(NCA)산하 CEOP(Child Exploitation and Online Protection Command) 같은 온라인 아동 성착취 전담 기구도 필요하다. 경찰, 검찰, 청소년보호전문가, 범죄심리학자, 사이버전문가가 협업해 범죄 예방을 연구하고 수사방향을 제시한다. CEOP에선 아동 포르노에 나온 벽지와 가구를 보고 만든 사람을 찾아내기도 한다. 우리는 CCTV에 많은 예산을 쓰는데, CCTV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잡는 거다. 예방적 조치가 필요하다. 가출청소년 등 위기 청소년을 위한 사회안전망 시스템(긴급전화 1388, 디딤돌센터 등)도 강화돼야 한다. 갈 곳 없고 돈 없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다 성매매나 n번방의 표적이 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인터넷 성문화가 너무 왜곡돼 있다.
“n번방이 어디서 나왔겠나. 우리 성문화가 너무 퇴폐적이고, 모든 걸 다 용인한다. 게다가 지상파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가 나오면서 야동이나 포르노를 문제시하는 것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아동 포르노를 갖고만 있어도 처벌하는 법을 어렵사리 만들었는데, 만드는 순간 무력화된 거다. 게임 속 여성 이미지, 언론사 사이트까지 장악한 음란광고는 어떤가. 이런 걸 보며 초등학생이 상상하는 성은 어떤 것인가. 여성을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들과 그런 자격이 없는 여성으로 나누는 프레임을 갖게 된다. 포르노를 통해 남성들은 성적 충동을 느낄 수 있겠지만 여성들은 불편하다. 왜 음란물을 남성의 시각에서만 보려 하는가.”
국내 아동청소년 성범죄의 특성이 있다면 무얼까.
“자료를 보면 해외 아동 성범죄자들은 대부분 소아기호증이다. 아이들에게만 성충동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우리는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영계 문화’의 일환이다. 필리핀 성범죄 집결지 실태 보고를 보면 백인 남성은 부끄럽다고 여겨 혼자 조용히 다니는데, 한국 남성들은 술 취해 떼로 몰려다닌다. 혼자라면 성매매를 안 했을 텐데, 떼로 갔기 때문에 왕따당할까 봐 어쩔 수 없이 한다. 단톡방 사건 때도 난이도 높은 불법 촬영물에 성공하면 박수 쳐주는 문화다. 정상적인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한 자극을 찾다 n번방까지 왔다.”
디지털 기술이 성착취를 더 악랄하게 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한사람 아닌 수십만 명에게, 얼굴도 공개된 상태로 일어난다. 영상의 완벽 삭제가 힘드니 피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오프라인 범죄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범죄자들을 쉽게 사이코패스, 악마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건 소수 별종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공분하는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가 ‘그들’일 수 있다. 위험을 각오한 여대생 두 명이 경종을 울렸고, 청와대 청원 게시판 500만 클릭이라는 시민들의 행동 하나가 사회적 의제를 만들어냈다. 내 주변을 바꾸고, 신고하고, 항의하는 시민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정치권 ‘n번방’ 방지법안 속속…생색내기 그쳐선 곤란

n번방 이후 정치권은 여야 불문 형법, 성폭력처벌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 n번방 재발 방지 법안을 내놓고 있다.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에 불법 촬영물 삭제 의무를 부과하고,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 형량을 강화하며, 성착취물을 이용한 여성 협박 행위를 처벌한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그 외 온라인 그루밍(길들이기) 등을 포함해 디지털 성범죄에 맞춤한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 제정도 추진된다. 대법원은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만들고 있다.

여가부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에 ‘성착취’ 개념을 추가해 성범죄와 관련한 아동청소년 보호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몸캠, 성적 대화, 만남 요구, 온라인 그루밍 등 신종 성범죄 처벌 안도 신설한다.

문제는 입법 의지다. 이미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여전히 통과되지 않고 있어 생색내기용이란 비판도 나온다.

최영희

1993~2002년  내일신문 발행인, 대표이사
2005~2008년  국가청소년위원회 위원장
2008~2012년  18대 국회의원(통합민주당)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