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서양 우월주의의 종언?

중앙일보

입력 2020.04.0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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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코로나19는 도발한다. 미국과 유럽의 서양 우월주의 신화에 의문을 던진다. ‘글로벌 리더 미국’ ‘선진국 유럽’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국제 질서를 주도해온 대서양동맹을 뒤흔든다. 19세기 식민주의,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을 거쳐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 그리고 미국 독주까지 200년 긴 세월 세계를 호령했던 서양 헤게모니를 위협한다. 비행기 탄 바이러스에 맥없이 농락당하는 자신들의 실체와 추락에 서구는 당황하고 있다.

미국·유럽 주도한 200년 국제 질서
코로나19의 무차별 농락에 흔들려
동양적 가치와 경제력 급부상으로
동·서양 문명 대충돌 불가피할 듯

요즘 미국·영국·프랑스 언론은 ‘코로나 이후’에 닥칠 동·서양의 권력 이동에 촉각을 세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영원히 바꿀 것”이라고 한다. 이어 “팬데믹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시장을 붕괴시키고, 정부의 무능을 노출한 것처럼 국제 사회에 정치적 경제적 파워의 결정적 변화를 불러올 게 분명하다”고 진단한다. 영국 가디언은 “서양이란 브랜드의 아우라가 바랬다. 코로나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힘과 영향력을 급속히 전환시킬 것”이라고 분석한다. 서양의 퇴조를 걱정하는 데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위대한 미국’이 초라해졌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자만과 오판이 완벽한 실패를 자초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선진국에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목격됐다. 텅 빈 공포의 뉴욕, 방호복이 없어 비닐을 뒤집어쓴 의사, 인공호흡기를 나눠 쓰는 환자, 두려움에 울부짖는 의료진과 시민의 참담한 광경은 세계인에게 미국을 다시 보게 했다. 사망자가 24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에 ‘허망한 죽음의 땅’이란 극단적 표현도 등장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유명한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을 ‘세계의 입법자·경찰·재판관 노릇을 하는 자비로운 패권국’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 미국의 리더십은 실종됐다. 코로나 사태에도 ‘나만 살자’식 ‘미국 우선주의’는 공조와 협력을 기대했던 우방들을 실망시켰다. “통 크게 간다(we’re going big)”며 2조2000억 달러(2700조 원)를 경기 부양에 쏟겠다고 했지만 ‘제2차 대공황’의 우려만 요란해진다. 가디언에선 “나르시시즘에 빠진 트럼프, 그가 더는 세계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작은 위안”이라고 꼬집었다.

둘째, 명색이 G7 선진국인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허상이 드러났다. 전염병으로 하루에 몇백명씩 떼죽음이 이어지는 나라들이 사회주의적 복지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에 자신들조차 놀랐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자랑하던 영국, 유럽의 경제 기관차로 불리는 독일, 삶의 기쁨(joie de vivre)을 누린다는 프랑스, 달콤한 인생(dolce vita)을 노래하는 이탈리아,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스페인은 과거의 영광에 그저 머물러 있었던 것인가.

‘하나의 유럽’을 꿈꾸는 유럽공동체 정신마저 사라졌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바이러스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서로의 국경을 닫고 이웃 나라에 의료품 지원을 막아버렸다. 세계를 지도할 선진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대서양동맹도 사실상 와해됐다. 유럽에서 코로나가 퍼지자 미국이 제일 먼저 한 방역조치가 유럽인 막기였다.

셋째, 동양의 재발견이다. 한국·중국·싱가포르·대만이 봉쇄, 사회적 거리두기, 신속한 진단 같은 대응으로 확산의 고삐를 잡은 방역모델에 서양은 주목했다. 개인보다 사회와 국가를 앞세우는 동양적 가치, 위계와 유대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장점을 새로 평가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아시아의 ‘강한 유대 사회’와 미국·이탈리아 같은 ‘느슨한 사회’를 비교했다. 그리고 “개인 자유보다 규율을 앞세우는 (아시아) 문화가 위기 때 사회 결속을 강화한다”고 했다. 동양적 가치가 ‘코로나 이후’ 뉴 노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넷째, 경제적으로 서구에 대한 동양의 종속 시대는 지나갔다. 서양 우월주의의 원천은 압도적인 부(富)와 힘이었다. 서양은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시장경제·민주주의 등 서구적 가치와 제도를 동양에 이식하려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9년 현재, 명목 국내총생산(GDP)에서는 달러 기준으로 세계 1위는 미국(21.4조)이지만 2위 중국(14.1조), 3위 일본(5.2조), 12위 한국(1.6조)을 합치면(20.9조) 엇비슷하다. 실제 국민들의 구매력을 평가하는(PPP) 기준의 GDP로는 중국(29.7조)이 미국(22.2조)을 따돌렸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이 재채기를 하면 지구촌이 독감을 앓는다.

서양 우월주의는 종언(終焉)을 고할까? 서양의 학자·관료·언론은 코로나 재앙을 스페인 독감, 1·2차 세계대전, 대공황, 금융위기 등 세기적 대격변에 비견하며 자성과 각성을 촉구한다. 그 저변에는 통치와 지배의 기득권을 내주지 않으려는 강자의 본능과 절박함도 깔려 있다. 우리가 ‘방역 모범국’이라고 우쭐대는 동안 중국의 동양과 미국의 서양 사이에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문명의 충돌이 시작됐다. 이 격동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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